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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 나치 정권의 또 다른 기록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01/09 06:31

이소영/언론인·VA 거주

해가 바뀌어도 한국의 국정농단 사건은 여전히 뜨겁다. 최순실의 전횡이 만천하에 드러나기까지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역할이 컸다. 고인이 생전에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을 지닌 덕분에 그는 떠났어도 그가 남긴 ‘비망록’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가 됐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쓰는 업무 수첩이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 증거가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 기록의 힘이 무서운 이유다 .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 파리는 암울했다. 스물한 살의 여대생 엘렌 베르가 살아가기에 무척이나 척박했다. 이때 대학생이었던 엘렌은 시대의 고통을 일기장에 기록했다. 파리의 경치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고 시민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유로웠다. 그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수용소로 잡혀갔고 그녀 또한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엘렌의 일기’(사진)는 그녀가 경찰에 체포돼 수용소로 이송되기까지 2년 동안을 기록하고 있다.

일기는 엘렌이 시인 폴 발레리를 방문하는 1942년 4월 7일부터 시작하는데, 그해 6월부터 모든 유대인은 가슴에 노란 별을 달아야 했다. 노란 별을 단 사람들은 지하철 마지막 칸에 타야만 하고, 외출시간, 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시간도 제한됐다. 당시 세상은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 나뉘어 있었다. 연인과 사랑싸움을 반복하던 평범한 여대생이 하루아침에 ‘특수신분’으로 전락했다. 노란 별을 제 위치에 달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강제 이송됐다. 참혹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엘렌은 본능적으로 이 상황을 글로 남기기 시작한다. 이 시대가 어떠했는지를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다.

나치 정권은 유대인들이 아름다운 파리를 감상할 여유조차 박탈했다. 파리와 어떤 관계도 없고, 이 도시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그런데 자신들이 파리의 주인인 양 활보하고 다니는 독일인들에 의해. 나치당의 지령에 따라 유대인들은 아이들과 노인 위주로 체포해 나갔다. 노동 현장에 투입될 젊은 남자들은 체포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보이는 대로 모조리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당에서 할당한 인원만큼 체포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붙잡히는 구조였다. 그래서 유대인들끼리 서로를 고발하는 행태에 이르기도 한다.

엘렌은 2년 동안 여러 번의 체포 고비를 넘기고 가족들과 숨어 지냈다. 불안한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엘렌은 당당했다. 수용소에 잡혀가기 전날까지도 종이 위에 꼿꼿하게 펜을 세웠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도 엘렌의 어조는 늘 일정하다. 담담하고 의연하게 써 내려간 모습이 마치 일본 군사법원의 재판을 앞둔 윤봉길 의사를 보는듯하다.

어쩌면 그 시절 엘렌은 울면서 절규할 여유조차도 없었는지 모르겠다. 가족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강인하게 단련됐을 것이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당장 생존을 고민해야 했다.

같은 시기 1942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쓴 열세 살 소녀의 일기가 있다. 안네 프랑크는 유대인 학살을 피해 다락방에 숨어 일기를 썼다. ‘안네의 일기’가 사춘기 소녀의 관점에서 본 세상이라면, ‘엘렌의 일기’는 여대생이 겪은 세상에 대한 기록이다. 엘렌의 일기에서는 유대인 체포 과정, 부모님이 끌려간 뒤 남은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적이다. 엘렌은 UGIF라는 유대인 단체 소속으로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고 남은 세간살이를 정리하는 일을 도왔는데 당대 생활상을 묘사한 부분이 감정적이지 않고 성숙하다.

보통 ‘엘렌의 일기’를 프랑스판 ‘안네의 일기’라고 부르지만 사실 두 사람의 삶은 차이가 있다. 이 둘이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한 달 사이로 사망했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엘렌 베르는 나치 점령 아래 프랑스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캠퍼스의 낭만과 박해의 고통을 동시에 경험했다.

나치도 사라지고 전쟁도 끝난 지금, 그녀의 기록은 역사가 되어 남았다. 당시에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일기장에 기록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녀의 당당하고 진실한 목소리는 큰 울림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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