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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 곰스크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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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7/01/23 06:41

독일의 무명작가가 쓴 책 한 권이 90년대 대학가에서 큰 화제가 됐다. 프리츠 오르트만 작가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사진)이다. 한 독문과 학생이 중간고사 과제로 수업 교재를 번역해 제출한 것이 시작이었다. 과제는 소설 일부분만 번역하는 것이었지만 학생은 당시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 소설을 끝까지 번역했다. 소설의 매력은 곧 대학생들 사이에 소문이 났고 학생이 타자기로 친 과제물은 비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최초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 번역본이 되었다.
대학생이 어려운 독일어 원서를 끝까지 번역하게 한 소설의 매력은 무엇일까? 줄거리는 간결하다. 남자는 어렸을 적 아버지 무릎에 앉아 곰스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동경해 왔다. 크면 꼭 기차를 타고 곰스크에 가겠노라 다짐했다. 어른이 된 남자는 결혼을 하자마자 아내와 함께 곰스크행 기차에 오른다. 설렘을 안고 기차를 탔지만, 중간에 정차한 간이역이 모든 것을 바꿔버린다. 아내가 그곳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이 곰스크행 열차가 그대로 떠나버린 것. 기차표를 다시 사기 위해 남자는 마을에서 식당일을 하며 돈을 모은다. 그 사이 아내는 숙소에서 깨진 유리창을 보수하고 안락의자를 사들인다. 마침내 기차가 도착한 날. 아내는 안락의자를 곰스크에 가져가겠다고 우긴다. 남자는 혼자서라도 곰스크에 가겠다고 맞섰지만, 아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끝내 기차를 떠나 보내고 만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와 교사로 정착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가족들과 함께하는 그곳에서의 삶에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아내가 잠들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오랫동안 철둑에 앉아있곤 했다. 그에게 곰스크는 최고의 꿈이자 이상향이었다. 그런데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자리를 떠날 수 없어 작은 마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누구의 가슴속에나 곰스크와 안락의자가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꿈의 나라 ‘곰스크’와 그 꿈의 발목을 잡아 주저앉히려는 ‘안락의자’는 언제나 공존한다. 곰스크로 갈 기회를 놓친 남자는 늘 가슴 한 켠에 원망을 품고 있었다. ‘아내가 붙잡는 바람에’,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이렇게 이유를 붙여가며 원망의 화살을 쏘아댔다.
운명은 그가 원한 곳에다 그 사람을 내려놓는다고 한다. 곰스크에 채 다 가지 않고 안락의자에 앉은 것도 그가 원하는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가정을 포기하는 것보다 내 안의 곰스크를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도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그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닌 그의 선택이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동안의 선택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애초에 곰스크라는 곳이 있기는 했을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지명이어서 거기에 도착하는 즉시 또 다른 곰스크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있든 시시때때로 깊은 곳에서 나를 흔들어대는 기차 소리에 괴로워하고 가보지 못한 미지의 이상향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을 쓴 프리츠 오르트만에 대해서는 사진 한 장조차 알려진 사실이 없다.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자주 다녔고 이후 터키 이스탄불에서 독일어 교사로 근무했다는 정도가 전부이다. 공교롭게도 앞서 언급한 최초의 번역자 안광복 씨 또한 유학의 꿈을 접고 고등학교 철학교사가 되었다. 그리스 유학을 다녀와 고전문헌 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의 사정이 그를 주저앉혔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 속 주인공 직업 또한 교사였다. 남자의 운명과 작가, 번역가의 운명이 놀랍도록 닮아있다. 그들에게 안정적인 직업인 교사는 안락의자였고, 갈망하던 유학은 곰스크였던 걸까.

이소영/언론인·V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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