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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 살인자의 기억법

“기차 레일이 끊어지는데도 그걸 모르고 화물열차가 계속 달려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레일이 끊어진 지점에 기차와 화물이 계속 쌓이겠죠? 난장판이 되겠죠? 어르신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26년 전 마지막 살인을 한 남자가 이제 70대 노인이 되었다. 건망증이 심해진 남자는 얼마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그때부터 무엇이든 기록하고, 기록한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망각에 맞서보지만, 병세는 심해진다. 남자가 필사적으로 기억을 붙잡는 이유는 딸 때문이다. 딸에게 접근하는 수상한 남자를 보자마자 아버지는 자신과 같은 종족 ‘연쇄살인범’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 남자는 난생처음으로 필요에 의한 살인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평생 오디오를 수집하던 남자가 회사의 지시로 행사용 앰프를 사러 다니게 되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하면서.

김영하 작가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사진)이다. 은퇴한 연쇄살인범이 딸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는 설정도 흥미롭지만, 이야기를 써 내려 간 방식 또한 재미있다. 여느 스릴러 소설처럼 공포감을 자극하는 묘사는 없다. 투박하게 던지는 남자의 한마디가 전부이다. 첫 페이지는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과거 연쇄살인의 기억을 떠올리면서도 남자는 차분하다. 오히려 아직 잡히지 않고 혼자만 아는 비밀로 간직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뿌듯해하는 것만 같다.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악을 일삼던 남자에게도 시간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치매라는 복병에 맞닥뜨린 순간 남자는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질수록 남자의 마음이 급해진다. 혼자만 알아본 연쇄살인범이 이번에는 내 딸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목숨을 놓고 마음대로 장난을 치던 연쇄살인범이 우리 집 개인지, 모르는 개인지조차 헷갈리는 모습은 시간과 기억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마다 소중히 여기는 기억이 얼마나 덧없고 약한지 이야기하고 있다. 연인과 이별한 뒤 한때는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던 기억, 설렘 반 두려운 반이었던 입사 첫날의 기억처럼. 당시에는 정신을 집어삼킬 만큼 어마어마했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진다. 그래서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 아닐까. 모든 기억을 붙잡고 힘겹게 살지 말고, 잊을 건 잊어가면서 살라고.
머릿속에서 ‘기억’과 ‘망각’이 얄궂게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남자는 자신이 기억이라고 믿는 사실조차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인다. 그러다 결국 이런 의심마저 사라진 공(空)의 상태로 최후를 맞는다.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과거의 기억을 잊음은 물론 현재 내가 누구인지도 송두리째 잊고 말았다. 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사형이나 체포가 아니라 기억을 갉아먹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 후반부로 가면 정신 없이 혼란스러워진다. 지금까지 기록된 남자의 기억과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남자, 25년 전에 저질렀던 살인은 정확히 소환해 내면서도 마지막 살인 행각만은 도저히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 사건의 희생자는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딸이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영화로도 제작돼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스크린 속에서 남자와 새로운 연쇄살인범, 딸의 이야기가 어떻게 변주할지 기대해본다.

이소영/언론인, VA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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