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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조선 유생들의 '문자폭탄'

#. 문자의 힘은 인류 역사를 바꿀 정도로 강력했다. 그리고 그 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지배자들에게 문자란 늘 불순하고 불온한 위협이었다. 피지배자의 의식과 행동을 바꾸는 데 문자만큼 위협적인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문명권에서 문자를 익히고 사용하는 것이 소수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던 까닭도 이것이었다.

20세기가 위대했던 것은 누구나 문자를 배우고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 인간 사회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민주주의도 문자 습득과 사용의 자유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절대 실현될 수 없는 신기루일지 모른다. 그런 문자가 요즘 한국에서 때 아닌 논란이 되고 있다. 새 정부 청문회 정국에서 야당 의원들에게 쏟아진 이른바 '문자폭탄' 때문이다.

이는 특정 정치인의 휴대폰으로 쏟아지는 반대자들의 항의이자 시정 요구를 말한다. 어떤 의원은 그런 문자를 1만 통이 넘게 받았다며, 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언어폭력이자 집단 테러라고 주장한다. 일견 일리는 있다. 욕설을 동반한 절제되지 않은 감정 분출은 분명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반대자들의 집단 저항은 있어 왔고 단지 그 방법만 달랐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문자폭탄 현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정치인들과의 문자 메시지를 통한 직접 접촉은 대의 민주정치의 불완전성을 보완해주는 직접 민주주의의 한 방식이라는 점이 그렇다. 또한 넓게 보아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 폭발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지난 탄핵 정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현하기 위해 광장으로 몰려나가 촛불을 들었던 것처럼, 혹은 태극기를 흔들었던 것처럼 이제는 문자 메시지를 통해 훨씬 구체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 상황은 다르지만 조선시대에도 이미 지금의 문자폭탄과 비슷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조선 후기 지방 유생들이 정치적 의사 표시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만인소(萬人疏)가 그것이다. 1792년 정조 때 처음 등장한 만인소 사태의 경위는 이렇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보위에 오르자 권력에서 소외됐던 남인을 중용해 개혁정책을 펼쳤다. 기존 집권 노론 세력은 이에 반발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한 번은 노론 관료 유성한이 임금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시중에 떠도는 풍문을 인용해 정조가 경연을 소홀히 하고 기생을 가까이 함으로써 궁중 법도를 어지럽힌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정조를 지지하는 성균관 유생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근거 없는 모함으로 임금을 능멸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영남 유생들은 유성한 상소문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관련자들을 색출, 처벌해야 한다는 집단 상소를 올렸다. 무려 1만 57명의 선비들이 연대 서명한 상소문이었다. 만인소라는 이름은 그래서 붙었다.

만인소는 노론 세력의 갖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결국 임금에게 전달됐고, 정조는 감읍했다. 그렇다고 만인소가 당시의 정치적 지형을 당장 바꾸진 못했다. 하지만 공론정치라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태동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뿐만 아니라 만인소는 별다른 정치적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문자로 자신들의 의견을 집단 표출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문자폭탄과 다를 바 없었다.

#. 디지털 시대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문자의 맛과 힘을 누구나 맛볼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그동안 가진 자, 배운 자들만 누렸던 문자 독점시대가 끝났음을 뜻한다. 언론과 문학의 영역 붕괴는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문자폭탄 사태가 보여주듯 정치도 더 이상 소수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독점물이 될 수 없게 됐다. 인류 문명사를 바꾸어 온 문자의 힘이 바야흐로 한국의 정치 지형까지 바꾸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이종호 OC본부장 lee.jongh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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