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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에서 ' 여사'로…평양의 퍼스트레이디

'여사(女史)' 호칭을 둘러싼 논란이 달아오르고 있다. 오는 27일 열릴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부인 이설주에게 청와대와 정부가 '여사'란 표현을 쓰겠다고 공식화하면서다. 정상 간 만남에 동반한 북측 최고지도자의 배우자를 부르는 데 '여사' 외에 마땅한 표현이 없다는 주장과 함께 아직 우리 국민의 정서상 무리한 호칭이란 지적이 나온다. 왠지 입에 잘 붙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이설주 여사' 표현을 둘러싼 서울과 평양의 분위기를 짚어 본다.

'여사' 호칭에 '존경' 표현까지
이설주 퍼스트레이디로 띄우기
28년 김정일과 함께 산 고용희
공개활동 없이 은둔의 삶 강요
"여사로 쓰는 게 자연스럽다"
청와대 입장 불구 논란 번져


"존경하는 이설주 여사께서 당과 정부 간부들과 함께 중국 중앙발레무용단의 '지젤'을 관람했다."

지난 15일 북한 조선중앙TV는 평양에서 하루 전 열린 중국 예술단의 방북 공연 소식을 전했다. 눈길을 끈 건 이설주(29)에게 '존경하는'이란 수식어를 처음 사용한 대목이다. 김정은(34) 위원장을 동반 않고, 이설주가 독자 공개 활동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중앙TV 보도를 담당한 아나운서가 이춘희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김정은 관련 행보만 도맡아 온 간판급 방송인이 이설주 동정 보도에 나섰다는 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핑크빛 정장 차림의 이설주는 최용해 당 부위원장을 비롯한 핵심 간부를 수행하고 행사장에 들어섰다.



중국 예술단을 이끌고 있는 쑹타오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그를 맞았다. 북측 간부 중에는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29) 당 제1부부장도 포함됐다. 올케와 시누이 사이인 이설주와 김여정은 쑹 부장 양옆에 앉았다. 그런데 중앙TV는 이설주만 단독 샷으로 화면에 부각시켰다. 이번만큼은 이설주를 '존경하는 여사님'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북한 당국의 의도가 읽혀진다.

북한의 이설주 띄우기는 2월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본격화했다. 북한군 창건 기념 군사 퍼레이드에 김정은과 함께 등장한 이설주를 북한 매체는 '여사'로 처음 호칭했다. 김정은 집권 첫해인 지난 2012년 7월 '부인 이설주 동지'로 표현한 데서 한 단계 치켜세운 것이다.

지난달 말 김정은의 중국 방문 때 이설주는 퍼스트레이디로 외교무대에 데뷔했다. 김정은·이설주 부부는 시진핑 국가주석과 부인 펑리위안을 만났다. 은하수관현악단 가수 출신인 이설주는 중국 음악학원에 유학한 경력이 있다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펑리위안도 같은 가수 출신이란 점에서 이설주와 공감대를 이뤘을 것이란 관측이다. 냉랭했던 북·중 관계를 녹이는 데 이들 두 사람이 윤활유 역할을 했을 것이란 얘기다.

북한에서 '여사'는 아주 낯선 호칭이다.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말대사전'(2006년, 사회과학출판사)은 '사회·정치적 활동에 참가하는 여성 활동가를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저명인사 중 여사로 불린 경우는 없다.

탈북인 출신 박사인 현인애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 연구위원은 "김일성 생모인 강반석과 어머니 이보익 등에게 가계 우상화 차원에서 여사란 호칭을 쓰지만, 그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본처 김정숙의 경우는 빨치산 활동을 함께 한 '항일 여전사'로 선전되고, 후처인 김성애는 '동지'로 불렸다는 것이다. 현 위원은 "동지란 표현은 당 간부를 의미하는데, 김성애는 조선여성동맹위원장이란 직책을 맡았기 때문"이라며 "이설주의 경우 아무 공식 직책이 드러난 게 없다는 점에서 동지로 계속 부르기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정은이 집권 초반부터 '부인 이설주'를 공식화하며 얼굴을 공개하고, 활발한 공개 활동을 펼치는 건 이전과 확 달라진 모습이다.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는 28년 간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하며 2남 1녀를 뒀다. 하지만 철저하게 은둔을 강요받았고 공개활동에 나설 수 없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함께 방북했지만 김 위원장은 혼자 나왔다. 고용희가 2004년 프랑스 파리에서 유선암 치료 중 숨졌을 때도 비공개리에 시신을 평양으로 운구해 묘지를 조성할 정도였다. 대북 정보당국 관계자는 "2002년 8월 조선인민군출판사에서 고용희를 '존경하는 어머님'으로 찬양 선전하는 책이 나왔다는 첩보는 있었지만 더 이상의 동향은 포착되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김정은 집권 직후 고용희 우상화를 위한 조심스러운 시도가 나타났다. 노동신문은 2012년 2월 13일자에 고용희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평양의 어머니'로 소개했다. 또 고위 간부를 대상으로 고용희의 생전 모습을 담은 기록영상을 방영했다. 본지가 입수한 이 영상에는 선글라스에 모피 코트 차림으로 김정일과 군부대 등을 방문한 모습이 드러난다. 김정일 생일 파티에서 "위대한 장군님을 평생 잘 모시고 따를 것을 다짐한다"는 충성맹세문을 낭독하는 이채로운 장면도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고용희가 북송교포 출신이란 사실이 드러나는 걸 꺼린 때문이란 분석과 함께 곧 생모 우상화가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청와대와 정부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에 이설주가 나올 공산이 크다고 본다. 임종석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청와대 비서실장)은 어제 브리핑에서 "이설주 여사 동반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김의겸 대변인은 6일 이설주 호칭과 관련 "여사로 쓰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공식적"이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고민도 적지 않다는 게 당국자들의 말이다. 회담이나 오·만찬에서 공식 호칭을 쓰는 건 불가피하더라도 정도가 지나치면 국민의 보편적 정서와 엇박자가 날 수 있다. 김정은 존칭을 두고도 우리 내부 갈등이 여전한 상황에서 '이설주 여사' 논란까지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선뜻 받아들이기 꺼림칙한 건 언론도 마찬가지다. 한겨레신문의 경우 1988년 창간 이후 대통령 부인에게 '씨'를 붙였으나,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지지층을 중심으로 '대통령을 무시한다'는 비판이 거세자 지난해 8월 '여사'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언어의 탈권위화, 성차별 표현의 배격이란 가치를 고수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김정은 체제 들어 북한은 은연중에 한국과 서방의 시스템과 관련 용어를 차용하는 모양새를 자주 드러낸다. 김정은의 '국가 직책'을 국방위에서 우리 국무회의와 유사한 국무위원회로 바꾸고, 당과 내각에 정책국 같은 이전엔 없던 명칭의 기구를 만든 게 대표적이다.

이설주에게 여사 표현을 쓴 걸 두고도 "남쪽에서 대통령 부인에게 쓰는 호칭인데다 북한 체제를 정상국가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현인애 위원)란 해석이 나온다. 부인을 '동지'로 부르는 건 예전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벌어진 우스꽝스런 일이란 판단이 내려졌고, 세계 추세와 발맞추려는 김정은의 생각도 작용했을 것이란 얘기다.


이영종 /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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