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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지우고 버리고 떠나려 한다

내 인생의 고초는 물욕에서 비롯됐다. 타지로 이사 가려고 집안살림 정리할 생각 하니 눈 앞이 캄캄하다. 어찌나 열심히 겁도 없이 많이 사 모았는지, 필요 없는 것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다. 가구, 실내장식용 소품, 그릇, 옷가지, 신발 등등 잡동사니 증후군 증세가 심각할 정도다.

3분 거리에 그로서리가 있는데 냉동실과 냉장고에 몇 달 먹어도 남을 식품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조선시대도 아닌데 넓고 큰 집, 곳간에 많이 쌓아두면 부자라는 멍텅구리의 착각! 문화 예술 철학을 앞세우고 가치있는 삶, 보람있는 인생을 노래하면서도 실은 물질만능주의 쾌락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왜 그렇게 많이 모았는지. 트럭 2대 정도 갖다 버렸어요. 그동안 쓰레기 더미에 살았어요." LA 로 이사 간 선배 부부가 하던 말.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가져가야 하나. 쓸모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을 가려내는 것이 내 남은 인생의 숙제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 한때를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법정스님의 어록 중에서.



40년 가까이 살던 터전을 뒤로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두려움과 기대감, 흥분과 좌절, 기쁨과 슬픔, 눈물과 환희, 고통과 즐거움, 끝남과 시작, 이별과 만남의 상반된 단어들로 만감이 교차된다. 등 돌려 소금 기둥 안 되게 물질의 환상에 발목 잡히지 않고 어제의 흔적 지우며 떠날 생각을 한다.

꽃같이 새파랗고 얼띤 나이에 김포공항을 떠나 올 때는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가슴이 벅찼다. 가진 것이라곤 여행용 가방 한개, 무겁지도 않고 힘겹지도 않았다. 알지 못하니 두렵지 않았고 앞날을 예측 못하지만 '꿈'이라는 단어에 희망을 걸었다. 내 나이 스물 둘, 화려하지 않아도 들꽃 보다 더 앙증맞고, 가진 것 없는 출발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초원의 집'이란 표지가 붙은 동네에 첫 집을 장만 했을 땐 너무 좋았다. 소꿉장난 하듯 살던 그 집에서 장애아인 리사를 돌보고 식도암으로 리사 아빠를 먼저 보냈다. 우서방 만나 죽자 사자 일해 레스트랑을 7개로 확장하고 '등대길' 팻말이 붙은 새 동네에 내 손으로 도면을 그린 꿈같은 집을 짓고 두 아이를 키웠다. 아! 그리고 꿈이 담긴 화랑과 아트 스쿨을 개관했다. 고난을 있었지만 불행은 없었다. 슬픔이 목을 졸랐지만 참고 버텼던 시간들.

이젠 모두 지우고 버리고 떠나려 한다. 얼굴과 손, 가슴에 남아 있는 세월의 흔적을 지우고 떠나려 한다. 그 곳이 어디든 거기는 내 인생의 종장을 마무리 하고 마침표를 찍어야 할 곳이므로. 비우고 낮아지고 작아져서 지축과 입 맞추는 땅의 냄새에 익숙해져야 하기에.

은둔의 초가집에서 깍지 낀 슬픔을 견뎌낸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장편 2권 쓸 수 있기 바란다. 물질을 탐내다 큰 것을 잃어버리는 소탐대실의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라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들을 버리는 대탐소실(大貪小失) 지혜로운 날들이 펼쳐지길 소망한다.


이기희 / 윈드화랑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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