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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아버지 출생의 비밀? 딸들은 오늘도 추리소설을 쓴다

[한국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3/31 23:02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17)
“오늘 할머니 제삿날이다. 퇴근길에 홍시하고 붕어빵 좀 사 오너라.”
“붕어빵을요?”
“살아 계신다면 이가 안 좋으실 테니 부드러운 게 좋다. 거창하게 음식 할 거 있니? 네가 할머니한테 사 드리고 싶은 것으로 준비해서 저녁에 함께 예배드리자.”

아버지는 위로 형님이 둘이나 있는 막둥이 아들이다. 게다가 크리스천인 우리 가족은 큰댁에서 지내는 제사에 그저 참석만 했었다. 큰아버지들이 차례로 돌아가시면서 참석하는 제사의 수도 줄었고 할머니 추모예배만 우리 집에서 드리게 되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뒤 내가 제사상을 차려야 한다니, 처음엔 막막했다. 어깨너머로 보거나 들은 것으로 고기와 생선, 나물 등을 준비해 구색을 갖추고 왜 그렇게 깎는지도 모르면서 과일 윗부분을 돌려 깎기를 해서 상 위에 올리는 등 제사상 흉내를 냈다. 그렇게 몇 년 지나니 예배드린 후 어차피 아버지와 내가 먹게 될 음식, 아버지 입맛에 맞는 게 좋겠다 하여 점점 변질되는 중이었다.




할머니 제삿날, 아버지는 홍시하고 붕어빵을 좀 사오라고 하신다. 큰아버지들이 차례로 돌아가시면서 할머니 추모예배만 우리 집에서 드리게 되었다. [사진 pixabay]






‘지금 할머니가 살아계신다면 뭘 사다 드리면 좋아하실까?’
일단 돈은 좀 들더라도 실패 가능성이 낮은 백화점으로 향했다. 식품관을 돌며 부지런히 찾았는데, 아버지가 주문하신 홍시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 했다. 계절이 봄으로 향하는 지금, 아무리 백화점이라도 붕어빵은 없었다. 대신 몽글몽글 고소한 인절미와 비닐하우스 딸기, 담백하고 부드러운 메로구이 등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할머니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란 해녀였다. 선주였던 할아버지에게 캐스팅되어 보길도까지 와서 전복을 캤다. 할아버지에게는 우리 할머니 말고도 다른 부인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살지도 돌보지도 않으면서 아이는 다섯이나 낳았다. 아버지를 낳았을 땐 “호박이면 삶아 먹기라도 하지 쓸데없이 왜 낳았누?”하셨다 한다.

아이들 기르고 학교 보내는 것은 온전히 할머니 몫이었다. 한 마을 사는 다른 부인의 손자와 아버지가 동갑이었는데, 손자는 새 옷에 흰 고무신 신겨 학교 보내면서, 아들과는 밥 한 그릇 마주 앉아 먹은 적 없었다 한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으로 끝날 운명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목포로 유학 간 배다른 형님댁에 얹혀살게 되었고, 그 집 화장실 변을 퍼 나르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신 적이 없다. 몇 년 전 아버지 팔순을 기해 가족자서전을 만들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여쭙자, 이름 한 자도 넣지 말라며 질색하셨다. 결국 얼굴 사진 한장 없이 가계도에 이름 석 자만 적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양손 가득 음식을 들고 귀가하니 아버지는 할머니 사진을 꺼내놓고 보고 계셨다. 준비한(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사 온) 음식을 차리고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공식기록엔 없는 아버지의 어머니이자 우리 할머니인 박옥광 여사. [사진 푸르미]






아버지는 기독교가정의례 책자 속 식순에 따라 차분하게 추모예배를 진행하셨다. 함께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살아생전 할머니에 대해 회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할머니는 제주도 구자면 월정리 출신입니다. 정확히 모르지만 성산면이라는 말도 있지마는 아무튼 28살에 김인수 씨라는 분에게 해녀로서 영업을 왔다가 인연이 되어서 2녀 3남을 낳아서 혼자 물질을 하면서 길러 가지고 자식들 전부 사회에 활동할 수 있게 해주신, 일생 땀만 흘리고 사랑만 베푸시다 희생하신 고귀한 분입니다. 항상 살아계실 때 잘 해 드리지 못하고 편히 못 모신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면서 오늘도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리가 어머니께서 남겨주고 가신 모든 사랑의 유산들을 고루고루 가정마다 나누면서 건강하게 지내는 가정이 되도록 할머니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사오며 간절히 바라고 원하옵니다.”

진지하게 말씀을 이어가던 아버지가 갑자기 멈추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그것 좀 어떻게 찾을 수 없나?”




전자가족관계등록시스템.






바로 스친 생각이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아버지께 걱정하지 마시라고 찾아보겠다 말씀드렸다. 다음 날 출근해 아버지 이름으로 가족관계증명서를 조회해 본 나는 내가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평생 호적에 오르지 못하셨고, 따라서 아버지의 어머니 자리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분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류로 할머니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지자 언니들과 당시 기억을 더듬어 추리해 보기로 했다.

막내인 나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단편적인 장면뿐이지만, 언니들은 비교적 또렷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언니 1은 당시 할머니 운명 소식을 접하고 아버지가 승강기 홀에서 눈물을 보였다며 제법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언니3은 부모님 안 계신 틈을 타 친구랑 놀러 갔던 일을 내세우며 자신 있게 1984년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언니3이 기억하는 사건은 할머니가 아닌 외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긴 토론 끝에 언니2의 주장이 힘을 얻어 할머니는 1982년 여름에 돌아가신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

당시 부모님이 급하게 보길도에 가시면서 언니1은 같은 아파트 사는 친구 집에, 언니2는 이모네, 언니3과 나는 외가댁에 맡겼는데, 이모 집에 갔던 자신이 언니1이 있는 곳으로 찾아와 함께 잤고, 다음 날 그 댁 어머니가 아침 식사로 달걀프라이를 해 주셨는데, 그때 처음 들기름 맛을 봤다고 자세히 서술해 점수를 얻었다.

할머니와 관련한 네 딸의 토론을 보고받은 아버지는 ‘다행이다’ 하시면서도 ‘내가 어떻게 어머니 돌아가신 때를 잊을 수 있나?’ 허탈해하셨다. 언니들은 내가 보내준 추도예배 동영상을 보면서, ‘이 음식을 막내가 준비했단 말인가? 이것이 과연 실화인가?’ 의문을 제기했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 그리 유리하지 않아 그것은 틀림없는 실물사진이라는 것까지만 확인해 주었다. 이렇게 집안 대소사 하나가 또 가까스로 넘어갔다.

추신 : 가족관계증명서에 의문이 또 하나 있었다. 할머니 이름만 없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성함과 증명서 속 이름이 달랐다. 또 다른 출생의 비밀인지, 아버지 기억의 혼란인지 네 딸의 추리와 토론은 계속될 듯하다.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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