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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신록의 오월에

햇살을 받은 새 잎새들은 불이 켜진 녹색 한지등처럼 그 결과 심을 드러낸 채 화사하다. 신록을 떠올리면 이양하의 신록예찬에서 읽은 구절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신록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하나 하나 씻어낸다….나의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眼前)에도 신록이다.”

날마다 눈을 뜨는 새 아침이면 마치 이 세상의 주인공인 양 화사하고 화려하고 설레던 날들이 있었다. 미래는 선물권으로 가득 차고 지나치는 사람들과 스쳐 부딪는 눈길 속에서도 부러움과 선망을 읽어내던 그런 시간들. 시내를 누비는 모르는 이들의 얼굴에서도 낯섦보다는 친근함을, 무관심이 아닌 호감을 느끼던 시절. 내 자신이 신록 같던 시절, 내 인생의 오월이었다. 숨길 것 없는 투명한 생활이 마치 햇살 속에서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한지등처럼 영혼을 투영해내며 어른들의 소소한 잔소리만이 삶의 걸림돌의 전부이던 시절. 그 시절에 느끼고 보았던 햇살과 바람과 신록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하다.

그 화사하고 화창한 오월에 몽둥이 세례를 받고, 피를 흘리며, 총칼의 난무에 쓰러져간 이들. 땅을 덮고 누웠어도 편히 잠들지 못했을 처절한 기억의 계절이 하필 오월이었다. 교통이 두절되고 전화도 불통이던 몇날동안 내내 사학대회에서 만난 적 있는 전남대 교우들을 영문도 모른 채 걱정하며 지내던 흉흉한 날들이 지난 후로는 살아있음이 무력감과 죄책감이 되던 80년의 오월. 맥없는 독백은 고백이 되었다.

시인도 아니었던 내가 아직 꽃다운 또래들의 영정에 젊은 그대라는 제목으로 바친 졸시가 몇 편 있다. 젊은 그대 2의 소재는 고백이었다: “만난 사이 없는데/ 끓는 이별이 있었고/ 사랑한 새 없는데/ 아픈 그리움이 쌓여갔다// 떠난 뒤 알게 한 이름으로/ 행동하는 몇마디 언어로/ 이다지도 가슴에 맺히어 온다// 그토록 가슴 태워 설워한 것이/ 내가 사는 이 세상이 아니었더냐/ 너를 죽게 한 것이/ 나인 것만 같구나// 햇볕 따사로운 날/ 오수에 쫓기는 의식 너머로/ 그대는/ 소리 없는 아지랑이로 오느냐/ 흔적 없는 실바람으로 오느냐”



신록의 오월은 또다시 돌아와 있다. 찰랑이는 머리결과 하늘한 옷자락을 바람결에 맡기고, 낭랑한 웃음소리를 거침없이 공중에 날리며 활기차게 보도를 걷던 또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동시대인들은 이제 깜빡이는 눈 사이로 보이는 활기 넘치는 사람들 속에 있지 않다. 익숙한 거리에는 상쾌한 바람과 햇살을 받고 피어나는 신록의 젊음이 넘쳐난다. 향긋한 비누향내를 풍기며 높은 옥타브의 음성으로 웃고 떠들며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그림자처럼 서성이는 나 그리고 우리 세대에도 신록은 여전히 참신한 신록이다. 오월의 모든 아름다움을 눈으로, 비극을 마음으로 품고 신록의 계절을 맞는 사람들이다. 산등성이 신록 가운데 핀 한 두 그루 오동나무꽃을 눈여겨볼 줄 아는 계절의 사람들이다: “부치지 못한 연서(戀書) 같은/연 보랏빛/ 참을 만한 /아픔의 빛깔// 열정을 접은 노신사의/물빛 담은 눈길/청정한 수목 사이로/ 산내 되어 깔리듯//고서(古書)의 몇 몇 글자/새삼 그 뜻을 물고 나오듯/ 천지 가득한 신록 한 가운데/불현듯 들어오는 우수의 자태// 지나온 생 찬찬히 돌아보면/ 지닌 것 아름드리 넘쳐 보여도/ 남길만한 것 변변치 않은/부도난 어음 같은 한 생의 빛깔//연 보라/ 참을 만한/ 아픔의 빛깔/넉넉히 품어 의연하게 하늘바라기.”

40년 만에 만난 지기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추억을 되새기는 것도 삶이고, 미래의 미지의 세계를 꿈꾸는 것도 다 삶”이라고 적어온 한 구절을 생각한다. 오월이면, 내 살아있는 한, “ 나의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眼前)에도 신록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 D]


최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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