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오하이오의 봄

작별은 찬연하다. 마지막은 아프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도 못하고 총총히 사라지는 이별처럼 슬프고 애절하다. 보낼 수 없는 그대를 보내는 날도 하늘은 목화꽃잎 뿌린 듯 흐드러진 구름 사이로 쪽빛 물감을 풀었다. 마지막 순간, 마지막 인사, 마지막 선물, 마지막 장면, 마지막 키스, 마지막 대사, 마지막 계절, 마지막 잎새 등 ‘마지막’이 붙은 단어들은 가슴 저린 연민으로 다가온다.

벌써 그렇게 됐나. 초롱초롱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새 땅 새 나라에서 새로운 꿈 펼치며 미국땅을 밟은 지도 어언 사십년. 비행기가 하늘 위 뭉개구름 속을 유유히 나르는 동안 나는 ‘내일’이란 말 대신에 ‘희망’이란 단어를 새겼다. 창문으로 내려다 본 중서부의 대평원은 넓고도 광활했다. 푸른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캔버스에 그려진 듯 울창한 수목 사이로 여우 꼬리처럼 가는 길들이 여러 갈래로 펼쳐져 있었다. 평등과 자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 희망이 살아 숨쉬는, 남의 땅 남의 나라에 낯선 얼굴 서툰 언어로 새 삶을 시작했다.

모르면 두려움이 없다. 알면 병이다.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많을 때는 정말 행복했다. 비교 분석이 안 되면 안달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다. 피부색으로 나뉜 평등 뒤에 숨은 차별과 맞서며, 자유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지불해야 하는지. 희망은 있는 사람 만이 꿈꿀 수 있는 가진 자의 선택이란 것을 알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깨지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코 다치고 다시 일어서고 무너지고 일으켜 세우며 창작센터와 현대미술화랑을 운영했다. 청춘과 장년을 아낌없이 불사르며 중서부 대평원에 인생의 반을 묻었다. 유대인이 장악한 세계미술시장에 생머리 뒤로 묶고 유일하게 활동하는 동양여자, 한국이름 이기희로 살아남기까지 무릎 깨져도 울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시간에 이판사판 목숨 걸었다.



운명의 여신은 잔인하고 공평하다. 자만으로 넘치지 않도록 고통에 빠트리고 절망으로 생을 끝맺지 않게 저울 추를 조정한다. 행복과 불행의 추가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한다. 오하이오에서 식도암으로 리사 아빠를 잃고 삼장기형 장애아인 리사의 풀잎 같은 생명을 지켜내고 어머니를 떠나 보냈다.

아!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끝이 있다. 내 평생 소원이 샌디에이고 라호야비치에 화실 열고 저 멀리 태평양 건너 내 조국 바라보며 초승달 모양의 크루아상으로 아침 먹고, 바닷바람에 머리 휘날리며 그리운 사람 그리워하는 것. 그러다 보면 한 맺힌 모국어로 장편 두 편 쓸 수 있지 않을까.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는 마가렛 미첼의 명문을 믿고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난 해부터 이사 갈 준비를 했는데 드디어 화랑 건물 2동이 팔렸다. 삼진 아웃, 이제 집만 팔리면 미련 접고 떠날 준비를 한다.

오하이오의 봄은 고혹적이다. 초록이 너무 아름다워 눈이 시려 눈물이 맺힌다.

‘너 떠나는 날에/숲에는 하루 저물도록/ 비가 내렸네/길 떠난 사람 /빗방울 헤며 /흐르는 강물 뒤돌아보았을까/ 안개 속으로 산이/산을 떠날 때/숲은 짙푸른 슬픔을 안고 (중략) /밑동까지 젖어버린 사랑이 있었네.- 서경요의 ‘작별’ 중에서

우리는 매일 이별 하며 산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난다. 마지막이 될 찬란한 오하이오의 봄을 가슴에 접어 넣고 떠날 채비를 한다. 봄은 내 눈 속에 있다. (윈드화랑대표, 작가)


이기희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