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최선주의 살며 사랑하며] 구월에

구월의 햇살은 살아있는 물상을 한결 더 반짝이게 한다. 앞에 선 이의 어깨 위에 곱게 내려뜨린 머리카락에서부터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새까지 모든 반짝이는 물상에서 오래 전의 기억들이 묻어나온다. 첫 데이트의 추억도 교정의 포플라잎새가 종소리를 낼듯이 명랑하게 반짝이던 9월의 햇살에 대한 기억과 함께다. 길가의 사금파리 한 조각이 마치 보석인 양 빛나고 분수대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도 사금 같은 반짝임이 섞이는 9월이 다시 돌아와 있다.

추석 무렵 옆집 동무의 아버지이기도 하셨던 아저씨 한 분이 큰 절을 하라고 주문하시고 절을 받은 후에 호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든 풋대추 한 알을 주셨던 기억. 어린 마음에도 그 어른이 참 실없다 싶으면서도 받아 들고 있던 대추알을 나중에 깨물어보니 퍽퍽한 질감에 아무 맛도 없어서 실망스럽던 기억까지. 풋내 나는 대추를 뱉어낸 후로는 추석상에 올라온 붉게 잘 익은 대추도 먹지 않게 되었다.

가시나무에 붉게 달린 대추를 보면 그 퍼석한 맛이 주제가 아니고 생명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찰한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라는 시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겉장이 뜯겨나간 오래된 가계부 노트에서 엄마의 일기를 발견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엄마의 꽉 찬 일상과 자식들에 대한 절절한 애정이 눈물겹게 적혀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멀리 타국에 사는 외딸을 생각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무치는 그리움과 함께 딸의 이름만 부르시듯 연거푸 적어 놓으시다가 펜을 내려놓으신 대목에서는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를 통해 세상에 나와서 엄마가 계신 세상에서만 산 세월이 이제 마감되었다. 계절이 바뀌면 엄마께 보낼 소품을 구하러 샤핑을 하던 것도, 초록빛을 좋아하셔서 에머랄드를 눈여겨 보게 되던 일도 더 이상은 소용이 없어졌다. 항상 엄마를 생각하면 애잔한 마음으로 연세 들어가는 모습에서 아슬한 슬픔이 있었으면서도 더 자주 안아드리지 못했음이 깊은 후회로 남는다.

열심히 살게 한 원동력이 엄마였음을 새삼 깨달으며 작은 대추 한 알도 계절을 살면서 겪어낸 빛과 바람과 날씨가 섞여있는 결정체이듯 내가 보아온 세상은 엄마를 통해 고운 빛깔의 프리즘을 통해 보던 안전한 세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엄마와는 무관하게 낯선 곳을 여행하고 자연을 관찰하고 감상하던 순간에도 엄마가 있는 세상이어서 안전했고 풍요했다. 해마다 장마가 끝나고 폭염이 물러간 9월이면 파랗게 높아지는 하늘만큼이나 가슴이 벅차고 새로운 기대로 채워지던 세월을 이제는 기억 속에서 헤아린다.

이제는 나를 통해 세상에 나와서 내게 엄마라고 부르며 여물어가는 아이들을 통해 그들의 꿈을 읽어갈 때가 되었다. 덧없는 물질이나 세상사람들이 구하는 보편적인 출세보다는 언젠가 뒤돌아 볼 때 회한이 적은 삶의 양식을 택하도록 더 많이 사랑하고 이해하며 거침없이 품어주는 삶을 살도록 일깨워줄 때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세월이 사실은 한 계절 품어 성장해서 붉은 대추 한 알같이 된 후에는 다시 돌아오는 계절을 살아갈 차세대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게 인생임을 조금 더 설득력 있게 가르쳐 줄 때이다. 할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 괸 눈으로 엄마가 들려주는 삶의 진솔한 내용은 회한을 피해 더 충만되게 살기를 원하는 고백이므로 가슴으로 듣게 되는 내용이 아니겠는가. 9월에는 세대를 이어 통하는 편지를 쓸 때이다. [종려나무교회 목사, Ph.D]


최선주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