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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열 목사 목회칼럼: 고난주간 묵상

월요묵상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느니라" (마 21:13)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장사꾼들을 호된 방법으로 내쫓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주님의 온유함과 상당히 다른 과격한 행동으로 성전을 정결케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만큼 성전에서의 신앙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제물의 모든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인간의 죄로 끊어진 하나님과의 교제를 제사를 통하여 인간의 죄를 처리하고 거룩이신 하나님과 비로소 교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패하고 왜곡된 성전신앙은 제사와 제물의 형식만 취하고 (오늘날 예배는 참석하지만...) (1) 자기 죄에 대한 통회함과 하나님의 사죄를 간절히 구하는 마음이 없고 (2) 하나님을 향한 그 어떤 관심도 없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망하고 그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자 하는 순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 교회는 이런 참된 신앙으로 건축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구속하신 성도는 참된 신앙을 재료로 교회를 건축해 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교회가 무엇을 집중해야 하는가? 를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고 그분과의 교제이며 그 교제를 통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은총이요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화요묵상

"그가 그 때로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 26:16)


가룟유다가 대제사장들로부터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하는 장면입니다. 3년 반동안 예수님과 먹고 마시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았을 제자가 예수님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에 분명한 언급이 없으니 그 이유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제 마음에 떠오르는 한 가지 이유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정치적 사회적 메시아로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세속적인 나라를 통치하는 구세주로서 예수를 좇다가 십자가에 죽기를 자처하는 예수에 대하여 실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현재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만 확인하려고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복신앙, 성공주의). 신앙은 현재의 문제와 물질적인 필요를 중요하게 취급하면서도 현재와 물질 너머에 보다 근원적인 세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천국. 영)를 기대하고 경험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신앙은 현실도피나 현실안주를 배격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경험하고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가게 만듭니다. 현실에 충실한 성도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의 통치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다스림을 기대하고 인정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가 가치가 있고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예수님이 내일 다시 오신다고해도 오늘 심어야 할 사과나무를 충실하게 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도가 죽음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순간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기대함으로 죽음조차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두렵고 떨리는 순간에도 주님의 임재와 사랑에 대한 기대와 신뢰 때문에 일상의 고난과 아픔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시선이 집중된 자는 가룟 유다와 같이 신앙의 길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지만 엄연한 실제 (Reality) 이신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신뢰하는 자는 현재적인 문제와 고통조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수요묵상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 26:7-9).
주님의 고난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면 내가 주님을 향한 신앙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묵상하고 적용하게 될 것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의 머리에 뿌린 향유는 아마도 노동자가 1년 동안 벌어야 장만 할 수 있는 매우 비싼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예수를 위하여 소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군가가 단순히 교회의 사역을 위해 1년 치 봉급을 헌금으로 드린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헌신을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대개는 제자들같이 이 여인에게 화를 내면서 비합리적인 소비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 헌금으로 가난한 자를 돕거나 개인적인 급한 필요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선하고 옳은 것이라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바로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경계선입니다. 개인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한 부단한 노동과 노력 그리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헌신과 구제와 사회정의를 위한 봉사...이 정도는 누구든지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 정도는 사회적 존재로서 보여줄 수 있는 헌신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판단을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 26:11-12). 이 여인의 값비싼 헌신에 대하여 주님은 사회적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평가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를 정리해 봅니다. (1) 이 여인이 주님께 드린 소비는 비계산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이것은 거룩한 소비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한 모든 헌신과 행위는 비판받아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소비하는 시간과 열정과 재물이 상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이 전혀 아깝게 느껴져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주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생명을 주고 받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전부 주셨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다면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계산할 수 있을까? (2) 신앙은 일종의 미지와 모험의 길을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가는 것이다. 미지와 모험은 성도에게 두려움과 희생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예상하지 못한 주님의 임재와 은총을 경험하는 신비를 보장한다. 이 여인은 자기의 전 재산을 주님께 계산하지 않고 바치는 모험과 미지의 길에 들어갔다. 그래서 제자들과 같이 가까운 사람들로 부터 비난과 혹평도 받았다. 그런데 주님으로 부터는 칭찬을 받았고 더 나아가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고 믿는 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마 26:13) (3) 신앙은 제자들이 보여준 이성과 합리성과 구제를 배척하지 않는다. 신앙은 오히려 매우 이성적이야 하며 이웃을 섬겨야 하는 사회적인 책임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신앙은 이성과 헙리성과 사회성의 경계선을 넘어서야 한다. 이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여인과 같이 미지와 모험의 길에 자신을 내 던질 수 있는 주님을 향한 강렬한 감사와 사랑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

목요묵상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8-39)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됨을 예견하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십자가라는 고난의 상징과 이를 몸소 겪어야 하는 주님과의 상관관계가 드러납니다. (1) 질병과 배고픔과 차별과 불의라는 고난 그리고 이 고난의 절정으로서의 죽음은 인간으로서 회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정의롭고 선한가? 그렇다면 아무런 잘못이 없는 나에게 왜 이런 불행과 고난이 일어났는가? 신은 불의하고 불공평한가?..." 등등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신학을 신정론 (theodicy = god + justice)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정론을 통하여서도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고난과 불행과 신의 존재와의 상관관계를 명쾌하게 풀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비슷한 어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매우 인간적인 고충을 표현하셨습니다. 즉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권력에 의하여 아무런 잘못도 없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불의함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모진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엿보입니다. (2)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난을 친히 받아야 된다는 사실이 우리들을 당혹케 합니다.
이런 당혹감 속에서 성경이 제시하는 고난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몇 가지 정리해 봅니다. (1) 고난과 그 절정인 죽음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죄다. 인간의 죄는 인간자신 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계에게도 고통을 주고 있다 (지진, 자연재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 (2)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메시야를 통하여 성취하시고자 한다. (3)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다. (4) 왜 하나님의 아들이 와야 하는가? 하나님만이 죄가 없는 의인이기 때문에 죄인들의 죄를 대속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인간을 향한 사랑을 충족시킨다. (5)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을 만드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고통과 질병과 불행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또다시 신정론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빌라도에게 분명하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요 18:36)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물리적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나라, 영이신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는 두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성도에게 이미 임한 나라 (Already...) (2) 그리고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나라 (...But Not yet). 그리고 이 두 가지 관점은 연속성을 갖습니다. 성도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영생)는 연속적으로 진행하여 주님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성도는 자기의 뜻과 고집을 관철하고자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아주 열심히 해서 자기의 야망이 성취된다고 합시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적이며 자기욕망으로 세워진 나라일 뿐입니다. 이 나라는 생명이 없으며 주님의 심판을 받을 나라입니다. 자기의 뜻과 욕망이 성취되는 나라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고통스럽지만 자기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삶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가 임합니다. 오늘 내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있습니까?

금요묵상

"제 9시쯤에 (오늘날 오후 3시) 예수께서 크게 소라 질러 이르시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6
예수님의 울부짖음 속에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는 인간의 모든 죄가 함께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의 심판과 저주 그리고 죽음의 운명 속에 있는 인간과 일체가 되셨습니다.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최초의 범죄자가 된 것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곧 모든 인간의 대표자가 되어 의인이시지만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또한 단절을 넘어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셔야 부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절과 회복..실패와 승리..수치와 영광을 동시에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고 장사지냄으로 그 죄를 완전히 도말시킴으로 죄의 권세를 깨뜨셨습니다. 죄의 권세가 깨뜨려졌다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새로운 생명 (부활생명) 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한 알의 씨알이 땅에 묻혀 죽음의 시간을 견디고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새싹이 나고 줄기와 꽃과 열매를 맺듯이) 탄생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육신의 죽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부활생명. 영생)" (고전 15:36, 42).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의 고통은 육신적인 고통을 넘어서서 한 번도 단절되지 않았던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이 더욱 크셨습니다. 예수님의 울부짖음은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의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몇가지 적용을 하게 됩니다. (1)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마치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면 나에게 이렇게 큰 고통이 일어나겠는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기 나름대로 인생의 고통을 잘 관리하며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나에게 왜 이런 고통과 불행이 찾아오는가? 이런 현실적인 질문들이 떠오를 때 위에서 언급한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받는 고통은 결국 썩어 죽을 수밖에 없는 3차원적인 것입니다. 이 고통은 부활생명에 비하면 잠시 동안 받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2)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선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센 병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마비된 병으로 알고 있습니다. 칼에 손이 베어 나가도 고통을 느낄 수 없다면 얼마나 비참한 병입니까?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통에는 반드시 어떤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욥을 묵상해 보십시오. 자기의 잘못과 전혀 상관없이 온 몸을 기왓장으로 긁어야 하는 그 억울한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욥은 내가 왜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수많은 질문과 토론을 거듭합니다. 그러나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합니다.
욥의 이야기를 통해 저 나름대로 결론을 내 봅니다: (1) “고통은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뜻이 담겨 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아무 의미 없이 고통 받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성도는 고통 중에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2)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의 역설은 무엇입니까? 죽음이 부활로 수치가 영광으로 실패가 승리의 자리로 역전되는 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고통 받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생명의 역사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고 가치 있으며 절대적인 것이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진 것만으로도 이 땅에서의 영광이요 승리요 부활입니다. 이런 면에서 송명희 시인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뇌성마비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매우 가난했지만 이 여인은 그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 그녀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무게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서도 십자가의 역설과 주님의 부르짖음을 묵상해 보십시오.

토요묵상

"그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마 27:66)
주님께서는 금요일 오후 3시에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문을 두려워하여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경비원을 세워 돌로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3일 동안 무덤에 머무신 사건을 통하여 몇가지 적용을 합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가장 두려워 한 이유는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하나님과의 단절이었습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Brannun Manning 은 이러한 전적인 신뢰를 “자기연민을 극복한 신뢰 (Ruthless Trust)” 라고 했습니다. 죽음 이후에 다시 부활 할 것이라는 그 어떤 보장은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온 인류의 운명과 자기의 운명을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전적인 신뢰는 성도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필요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죽음 너머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와 위험함을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의지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2) 성도는 영적으로는 이미 예수님과 일체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지내고 부활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일상 속에서 적용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판단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연민과 탐욕을 내려놓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들뿐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을 경험한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일시적이고 탐욕스러운 것들로 부터 자신을 절제합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과 나무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느낍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이전에 지나쳤던 시간과 장소와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성도는 죽었다 살아난 존재입니다...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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