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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한인이민교회의 역사(13)

벧엘교회 당회는 매월 첫 주일에 열렸다.
1990년5월 당회는 새벽 2시까지 진행됐다. 김목사가 당회에 낸 사표안을 놓고 장시간 논의했다.

당회원 11명 가운데 10명이 참석했다. 김목사는 서울 할레루야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으며 이를 놓고 오랜동안 기도한 끝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참석한 당회원 전체가 받아드릴수없다고 하자 김목사는 떠나야 할 이유를 한시간에 걸쳐 설명했다. 설명 내용을 공개할 수 없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김 목사는 한 10분간 정회를 하고 각자가 기도를 한 후 투표를 하자고 제안했다. 재회 직후 무기명 투표에 들어갔다. 그리고 사표안은 통과됐다.

김상복 담임목사가 볟엘교회를 떠난지 4개월만인 1990년 11월 18일 벧엘의 첫 부목사인 손인식 목사가 사표를 냈다. LA 베델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이별을 고한 것이다.



1981년 12월 6일 취임 한 후 약 5년간 시무한 후 사임, 1985년 10월 디트로이트침례교회 담임으로 2년간 시무하다가 벹엘로 다시 귀환한지 3년만이다.

김 목사는 떠나면서 후임으로 손인식 목사를 당회에 추천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당회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8년간 김 목사를 도와 벧엘을 정성껏 섬겨 왔으며 ‘벧엘문화’ 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손 목사가 후임이 되면 벧엘의 전통이 큰 무리없이 이어질것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기대를 했었다.

결국 당회는 청빙후보를 외부에서 찾기로 결정했다. 떠나기 전날 저녁 손목사 내외와 우리 내외는 오랜만에 자리를 같이하고 지난 8년간의 벧엘 추억들을 나누었다. 심방했을 때 일어난 이야기들, 선교센터를 같이 섬겼던 이야기들, 주일 장년 성경공부와 특강의 이야기들, 김상복 목사의 영어설교를 손목사가 한국말로 통역했던 이야기들 등 우리는 밤늦게 까지 벧엘의 옛날들을 반추했다.

다음 날 손목사가 떠나는 공항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었다. 떠나는 손목사는 울고 보내는 교인들도 울었다. 3년 후 LA 베델교회에서 손목사 내외를 만났을 때 우리에게 대형 본당건물 청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교인수 60명 내외를 6천명을 길러 놓고 2천명을 수용할 수있는 대형 본당건물을 완성하고 5년 전 65세로 은퇴했다. 나는 이제서야 하나님께서 왜 손목사가 벧엘교회를 떠나 베델교회로 가게 하셨는지 그 뜻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당회는 1988년 3월 20일 벧엘교회 2대 부목사로 취임한 송영선 목사를 임시당회장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청빙과정이 진행됐다. 1992년 2월 당회는 청빙대상으로 LA지역에서 온랜동안 목회를 성공적으로 해온 교계에 널리 알려진 K목사를 만장일치로 후보로 결정하고 교인총회 인준을 요청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총회는 그분을 인준하지 않았다. 송영선 목사는 몇 주 후 주일 설교시간을 통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벧엘교회 당회를 해체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3주가 지났다. 송목사는 예배 광고시간을 통회 이번에도 아무런 설명없이 당회 회복을 선언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송목사에게 물어보지 않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정해진 계획들을 잘 진행했다.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인디아, 하이티, 몽고 등 단기선교를 다녀왔다. 1992년 8월 7일부터 2일간 가졌던 "가든지, 보내든지, 기도하든지"라는 제목의 벧엘교회 첫 선교대회는 교인들에게 선교에 대한 안목과 관심을 넓히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때 초청된 강사는 시카고 휘튼대학에서 있었던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로 김익배, 이철수, 최효원, 한도수, 황상호, 선교사 등이었다. 시무장로들과 선교센터 임원들이 선교사들의 민박을 맡았다.

러시아 황상호 선교사는 우리 집에서 4일간 머물면서 정말 좋은 교제를 가졌고 황선교사를 더 잘알게 되었다. 그 후 벧엘 방문 선교사들은 민박이 전통이 되었는데 어느새 사라져 가고 있는 듯 해서 좀 섭섭하다. 1991년 2월 29일 박동훈 목사를 대학부 담당 부목사로 청빙했다. 담임목사 부재중임에도 홍기본목사와 박동훈목사는 서로 잘 협조하여 영어예배를 크게 부흥시켰다. 이때부터 벧엘교인들은 담임목사 부재중에도 ‘할 일은 해 나가는 훈련’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 신기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이다.

1993년 2월 14일 송영선목사의 송별예배를 드렸다. 송목사는 1988년 3월 20일 부임 후 5년을 시무했다. 송목사는 2월 당회에서 사표를 냈다. 그날 밤 늦게 모든 당회원들이 송목사 댁을 방문하고 사표를 반려할것을 간청했다. 송목사는 떠나야 할 때가 됐다면서 양보를 하지 않았다.

송목사는 김상복 담임목사와 손인식 부목사가 떠난 후 임시당회장으로 많은 수고를 했다. 송목사의 성경공부시간을 아쉬워하는 교인들이 많았다. 나는 송목사의 마태복음강해 성경공부를 거의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송목사는 교인들의 아쉬움속에서 이별을 고했다. 이로서 ‘벧엘의 첫 새대’가 마감했다. 그 후 송 목사는 30여 명의 벧엘교인들과 빌립보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빌립보교회는 큰 교회건물을 마련하고 이 지역에서 대형교회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는 2년 전 박동훈 목사에게 바턴을 넘기고 은퇴했다. 나는 그의 은퇴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결국 하나님은 벧엘교인들을 흩으시더니 빌립보교회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시는구나”라고 속으로 말했다.


허종욱 / 버지니아워싱턴대 교수,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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