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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못하는 어머니가 부끄러웠어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데이 특별 기고 사무엘 손 목사

'칭크'라는 놀림은 자아상으로
나도 모르게 인종주의 내면화

한인 사회에도 인종주의 작동해
타인종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나
편견과 차별 무의식속에 나타나
예수의 렌즈로 인종 바라봐야


어제(20일)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는 비폭력 인권 운동의 대명사였다. 인종 차별에 반대하며 당시 사회 근저에 자리 잡고 있던 편견을 사랑으로 덮으려 했다. 그러나 차별적 인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무의식 속에 내재하고 있어서다. 마틴 루터 킹 데이를 맞아 미국장로교단(PCUSA)의 사무엘 손(사진) 목사가 본지에 글을 보내왔다. 그는 한인 2세다. 교단 내 다인종 사역을 담당하는 '다양성과 화해를 위한 부서' 책임자로 활동중이다. 손 목사의 영어 기고문은 PCUSA 이동우 목사가 한국어로 번역했다.



언제부터 거울을 들여다보다 내 얼굴을 응시하는데 내 눈이 가늘고 쭉 찢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7살 즈음 미국에 오게 된 후 부터인듯 싶다. 그때 눈가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며 얼굴 모양이 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게 기억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는 방식대로 '나' 자신을 본다. 이는 타인의 방식에 의해 내면에 형성된 얼굴을 의미한다.

어린 시절 같은 반 친구가 눈 가장자리에 손가락을 대고 쭉 잡아당기며 나를 '칭크(chink)'라고 부르며 놀렸을 때 그것은 나의 자아상이 됐다.

한국어도 마찬가지다. 미국에 왔을 때 나는 영어를 빨리 배워야 했다.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이후 영어를 배우면서 한국어를 싫어하게 됐다. 영어만 할 줄 아는 친구들이 한국어 소리를 '계단을 구르는 깡통 같은 소리'라고 조롱해서다.

그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백화점에 가는 것을 싫어하게 됐다.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문법에 맞지 않는 영어로 흥정하는 것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서 흥정을 하는 것은 정말 '미국적이지 않은' 일이었고 그런 어머니가 너무 부끄러워 마네킹 뒤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정의할 수 있다. 그때부터 나는 인종주의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한 인간을 판단하도록 세뇌시킨 인종주의적 렌즈를 통해 나 자신을 보고 있던 것이다. 나는 백인이 나를 볼 때 그들의 미적 기준에 비추어 한참 모자라는, 바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아시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셈이다.

이것이 인종주의의 교활한 점이다. 피부색을 가지고 사람을 정의하는 판단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파고든다. 이러한 관점이 정책을 통해 강제되고 지지되며 미디어는 이것을 지속시킨다.

한인 교회에서 자라는 동안 우리는 인종주의를 자주 다루지 못했다. 인종주의와 복음이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탓이다. 이런 문제를 자각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됐다. 그때, 한 흑인이 내가 목회를 하고 있던 한인 교회내 영어권 사역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 형제는 교회에서 장로도 됐다. 그와의 우정은 내가 이제는 그의 눈을 통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때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구원'이 단순히 개인을 위한 영혼 구원의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기반한 새로운 자아상과 윤리를 창조하는 것, 다양한 문화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복음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바탕으로 나는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바울은 여기서 내가 씨름하고 있던 동화됨을 위한 자기 기만과 억압적 기재에 이름을 붙였다. 바울은 이를 '거짓 복음', 신학자들은 '율법주의'라 했다. 이것은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죄에 대한 용서함을 받았다며 믿으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예수가 모든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는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뜻한다.

복음은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의 선물에 있다고 증언한다. 인간의 가치가 다른 사람에 의해 주어지거나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은 내가 백인이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또한, 나의 어머니가 영어를 완벽하게 말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전한다.

한인 사회에는 내면화된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이는 흑인 또는 히스패닉 등을 대하는 태도에서 종종 드러난다. 인종주의에서 그 기준은 백인이다. 구조화된 계층화는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황인종은 검은색 피부 인종이나 갈색 피부 인종보다 우위를 점하려 한다.

한인들이 그들을 상대로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방식으로 행동할 때, 인종주의적 계층화는 고착된다.

편견은 노골적 방식이 아닌, 의식이 닿지 않는 곳에서 생각과 행동, 경험을 조정하며 작동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나는 내 눈이 쭉 찢어지고 못생겼다고 여겼다. 이는 갈색 또는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을 덜 가치 있게 보게 했다. 이 두 가지 시각 모두 '백인성(whiteness)'에 기인해 왜곡된 인식이다.

때로는 자아상과 자존심을 내세우며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나는 마치 유대인과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유대인이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지키려고 했었는지 이해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회는 강력한 로마 제국에 살던 소수인종으로서, 일치에 대한 유혹과 싸우려는 부담과 강요된 욕구 모두를 가진 한인 사회와 유사해서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복음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주어졌다. 복음은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어떤 인간의 판단도, 심지어 미디어와 정책에 의해 강요된 백인성의 율법이라 해도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설 수 없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종의 렌즈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렌즈로 바라보는 것은 지금도 꾸준히 해나가야 할 일이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어설프게 영어를 구사했던 어머니에게 사과하고자 하는 '나'를 발견한다. 빌립보서의 성경 구절을 붙든 채 말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립보서 2:12-3)

*지면 사정상 글의 일부분이 편집됐습니다. 원문은 코리아데일리닷컴(koreadaily.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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