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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산책] 작은 것들을 잊고 살았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몇 해 전 뒷마당 한구석을 수놓던 나팔꽃 씨였다. 꽃씨를 보관해 둔 것조차 잊고 살았는데 꽃씨는 기다린 듯 나를 까만 눈으로 바라보았다.

손바닥 위에 꽃씨를 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꽃씨 한 톨을 손바닥 위에 얹혀 놓고 꽃으로 피어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환해졌다. 손톱보다 작은 것에 무한한 가능성을 엿본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오랜만의 전율이었다. 씨앗이 씨앗으로 끝난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나? 작은 씨앗 하나에 지난 시간이 있고 미래가 있고 다시 나눌 이야기가 있어 소중한 것이다.

꽃의 몸이 꽃씨다. 한여름 뜨거웠던 시간을 잊지 않고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모습으로 찾아가는 꽃의 씨앗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보다 믿을 만하다. 그 작은 몸이 어찌 한 시절을 품을 수 있을까? 쥐똥만한 것이 어찌 매해 변함없는 모습으로 피어날 수 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작음'에서 찾으려 한다. 몸을 낮춘 것은 다시 꽃이 될 수 있다. 최소한은 최대한이 될 수 있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수없이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은 '작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은 것들은 밟아도 깨지지 않는다. 이미 낮은 것들은 빼앗길 것이 없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수많은 단어를 잃어버렸다. 언제부터인지 바람, 새, 비, 꽃, 흙 등 마땅히 설레어야 할 단어들이 무감각해지고 시시한 이야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람을 말하면 현실을 모르는 감성주의자처럼 보이고 별을 말하면 왠지 덜 성숙한 어른을 보는 것 같아 속으로는 웃었다. 작은 것들을 잃어버린 자들이여, 작은 것들 중 어느 것 하나 사람보다 못한 것이 없다면 믿겠는가?



때를 알아보고 계절을 바꾸는 바람을 보아라. 새는 눈이 오는데도 날갯짓을 하고 하늘을 난다. 눈 덮인 숲속에서도 한 줄기 울음으로 질긴 생명을 예고하는 새를 보아라. 목마른 땅을 골고루 적셔줄 뿐 아니라 저문 꽃들을 떨구어 더 많은 꽃을 피게 하는 요술쟁이 비를 보아라. 몸을 지움으로 또 하나의 몸을 탄생시키는 꽃나무를 보아라. 죽은 것 같은 가지에서 솟아오르는 몽우리를 보아라. 흙은 산 자나 죽은 자나 어느 것 하나 내치지 않고 품는데 누가 이것들을 작다 말하는가? 씨앗이 씨앗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작은 것들은 작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힘든 일로 인해 형제들을 찾아간 친구가 한 명 있다. 친구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한 문제를 가까스로 꺼내어 이야기를 이어 갔는데 어린 자식을 무릎에 앉혀 놓고 자식에게 한 술이라도 밥을 더 떠먹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본 뒤 친구는 뒤돌아서 나왔다고 했다. 그 이후 친구는 나이가 들도록 형제들과 왕래를 하지 않았다. 친구는 큰 것을 바란 것이 아니다. 친구가 원했던 것은 아주 작은 것이다. 형제가 아파할 때 진지하게 들어주고 울어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작은 것들이 얼마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큰 것이 아닌 작은 것에 휘청거리는 것이 인간이다. 말, 표정, 마음, 눈물 등 작은 것들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죽을 것 같이 힘들 때 따스하게 잡아주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하나로 우리는 툭툭, 힘든 일을 먼지처럼 털고 일어나기도 한다.

나팔꽃의 꽃말은 "일편단심 사랑"이라고 한다. 그 옛날 중국의 마을 원님은 화공의 아름다운 아내를 탐해 수청을 들게 한다. 화공의 아내는 끝까지 정조를 지키다가 관아 꼭대기 방에 갇히게 된다. 아내를 빼앗긴 화공은 실신한 사람처럼 살다가 그림 한 장을 그려 아내가 갇힌 곳을 찾아간다. 화공은 번번이 아내가 갇힌 꼭대기 방을 바라만 보다가 돌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화공은 탑 밑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묻고 아내가 갇혀 있는 꼭대기 높은 방을 바라보다 생을 마감한다. 화공이 죽은 자리에서 벽을 타고 올라가 핀 꽃이 나팔꽃이다. 옛 중국 사람들은 화공의 혼이 아내를 보기 위해 죽어서도 벽을 타올라 피어난 것이 나팔꽃이라고 믿었다.

별 것 아닌 꽃씨 하나가 때가 되면 어김없이 피어난다. 작고 잊기 쉬운 것들이 핵심일 때가 많다. 작은 약속을 잊지 않고 작은 바람을 느껴야 꽃을 피우지 않겠는가?


김은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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