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살며 생각하며] 정상들의 국어공부

밥을 짓기 위해 한국산 전기 밥솥에 쌀을 앉혀 놓으면 "쿠크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하는 음성 메시지가 나온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취사에도 맛있는 취사와 맛없는 취사가 있다는 말인가. 맛있는 것은 '밥'이지 밥을 짓는 행위인 '취사'가 아니지 않은가.

바르고 정확한 말의 사용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중요하지만 특히 돈이 관련된 비즈니스 거래에서는 단어 하나, 토씨 하나를 잘못 사용해도 뜻밖의 큰 낭패를 보게 되기 때문에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단어와 문구 하나 하나를 꼼꼼히 따지고 검토하는 것이다.

개인이나 기업간의 거래에서도 올바른 언어의 사용이 이렇게 중요할 진대 하물며 국가간의 협상에 있어서 정확하고 분명한 언어 사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국가간의 협상 결과를 담은 문건인 조약서나 협정서, 합의문 등은 한 번 작성되면 오랫동안 당사국 국민들의 경제활동은 물론 국가 안보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비핵화를 협의하기 위하여 지난해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역사적인 미·북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회담 후 공동합의문에 서명하였다.



A4 용지 한 장 정도 분량의 짧은 합의문 내용 중 1항과 2항은 양국의 관계개선에 관한 내용이고 4항은 미군 유해 발굴에 협조한다는 내용이며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된 내용은 제3항에 다음과 같이 간단히 언급되어있다.

'4·27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며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하여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이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읽는 사람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 매우 애매모호하고 위험천만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첫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주체는 '북한'으로 되어 있다. 미국이나 대한민국은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당연히 북한의 비핵화로 생각하고 공동선언문에 서명했을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회담을 끝내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국민 여러분 이제 북한의 핵 위협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밤부터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하고 트윗을 날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문장의 주어인 '북한' 다음에 나오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적어 문구는 '북한의 비핵화'와는 180도 다른 각도로 해석될 수 있다. 즉 북한의 비핵화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보호하는 미국의 핵우산 철거, 핵항모, 핵잠수함, 전략폭격기 등 미군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중지, 나아가서는 미군철수와 한미동맹 해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끔찍한 독소조항인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 라는 문구를 북한은 미국과의 상호 군축회담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미국은 북한만의 비핵화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북한의 핵물질과 핵시설 리스트 신고를 요구하러 평양에 갔던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북한이 '깡패' 라면서 막말비난을 한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떡 줄 사람 생각도 않고 있는데 미국이 김칫국부터 마신 것이다.

공동 합의문 제3항의 마지막 구절은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로 되어 있다. 즉 비핵화를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 '노력하겠다'는 것을 약속한 것이니 노력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안 해도 그만인 것이다.

제2차 미.북 정상회담이 곧 열릴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만약 회담이 다시 열리게 된다면 회담 전에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 세 사람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우리말 바루기' 칼럼을 쓰는 조현용 교수로부터 두 어 시간 특강을 듣고 회담에 임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누가 읽든지 간에 같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정확 명료한 합의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채수호 / 자유기고가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