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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 편지] 영화 ‘헤로니모’와 꿈꾸는 아리랑

[애틀랜타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9/11/13 15:12

심준희

전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사
애틀랜타 한국학교 교사

“어! 이거 우리 불렀잖아요!” 아홉 살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에 반가움이 역력하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목소리엔 내가 잘 아는 그 무엇을 공유할 때의 우쭐함도 배였다. 쿠바에 사는 한인 할아버지(고 임은조 선생의 동생)가 기타를 치며 후손들과 아리랑을 열창하는 장면은 곧 아이에게 학교의 ‘문화의 밤(Cultural Night)’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복을 입고 가야금 반주에 맞춰 불렀던 아리랑의 기억을 소환시켰다. 영화 ‘헤로니모’의 애틀랜타 상영회에서의 일이다.

전후석 감독의 다큐멘터리, ‘헤로니모’는 피델 카스트로 등과 쿠바 혁명을 이끈 주역이었으며, 쿠바 내 한인 커뮤니티의 재건과 정체성 모색을 위해 헌신했던 고 임은조 선생의 발자취를 담았다. 처음부터 그에게 ‘한국’과 ‘한민족의 정체성’이 절실한 그 무엇은 아니었다. 그는 쿠바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거쳐 고위직에 오른 사람으로 그 누구보다 완전한 쿠바인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가 노년에 쿠바 한인의 구심점이 된 바탕에는 그의 아버지, 임천택 선생의 정신이 깔려 있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도에도 기록된 임천택 선생은 쿠바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독립자금을 보내고 후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한민족의 정신을 심으려 힘쓴 인물이다.

영화에는 처절했던 한국인의 근대사와 치열했던 쿠바인의 혁명사, 그 안에서 ‘나’와 ‘우리’를 갈망했던 한 개인의 뜨거운 삶이 담겼다. 그래서 영화는 가슴 저릿한 감동을 주면서도 아프다.

영화는 말한다. 백여 년 전, 한국인들이 어떻게 디아스포라가 됐으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어떻게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한 버팀목이 되었는지. 동시에 영화는 묻는다. 오늘을 사는 우리,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어떤 삶의 방향성을 가질 것인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연대하고 확장되어 나갈 것인가? 영화에는 몇 곡의 의미 있는 노래가 등장하는데, 이들 노래는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 잔잔하면서도 진한 여운을 더한다. 더불어, 영화가 던지는 묵직한 물음의 답을 찾는 여정에 친근한 길벗이 되기도 한다. 특별히, 아리랑은 전혀 다른 시공간의 삶을 사는 쿠바의 노인과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홉 살 소년을 조우케 하는 매개가 되었다.

아리랑의 음악적 뿌리는 강원도 지역에서 불린 토속민요 ‘아라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아라리는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당시 서울로 온 강원도 노동자들로부터 소리꾼들에게 전해져 서울의 음악색을 띤 ‘아리랑’을 낳았다. 통속화된 아리랑은 전문 음악가들에 의해 각 지역의 음악적 특색을 바탕으로 변형되면서 여러 아리랑으로 재창조된다.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등이 모두 비슷한 무렵 만들어졌다.

가장 널리 불리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서울의 음악적 특징을 가진 ‘본조 아리랑’이다. 이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항일민족정신을 담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음악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예술성과 흥행 모두에 크게 성공하며, 아리랑은 민족의 노래가 됐다.

오랫동안 그리고 빈번히, 아리랑은 한국인의 슬픔과 서러움, 그리움과 한 맺힘 등의 무겁게 짓눌린 감정들이 응축된 상징적 노래였다. 그러면서도 아리랑은 한민족에게 근현대라는 역사의 시공간에서 여러 특별한 지점마다 형성된 공동체적 정서를 바탕으로 다양한 콘텐츠로 끊임없이 꿈꾸며 변모해왔다. 세계 곳곳에서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창조적 연대와 협력을 희망하며, 아리랑이 다시금 ‘나’와 ‘우리’를 연결해주는 자긍심과 당당함의 문화적 매개가 되기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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