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칼럼]신사, 숙녀가 되자

대표적인 조각 미남 장동건이 나왔던 “신사들의 품격”이 몇년 전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다면, 요즘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은 다 아는 모스크바 신사 ‘로스토프’ 백작을 기억하자.
그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적폐로 몰려 총살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우연히 쓴 시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고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종신 연금생활을 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대부(代父)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기억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라는 격변기를 몰락한 귀족의 비참함이 아닌 무한 긍정의 자세로 헤쳐 나간다.
비록 현실의 독자들은 서슬퍼런 공산체제가 이미 몰락했음을 알고, 그 당시의 긴장감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소설 속의 그 시대는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압도했던 사회주의 전성기였다.

살기 위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무조건적인 복종과 영혼 없는 순응을 택하지 않은 백작은 용기있게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소통과 이해를 하게 되고 결국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신사의 품격을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경제를 방치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린 탓인지, 여기저기서 조심스럽게 생산, 소비 활동을 재개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유럽, 미국과 다르게 별다른 록다운 없이 순전한 K방역만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이 통제되는 것처럼 보였던 한국도 상황이 갑자기 나빠진 모양이다. 비록 미국이나 다른 여타의 나라들에 비해서 발병 숫자가 여전히 미미하지만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에서 수도권이 뚫리면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 초기에 대구, 경북에서 벌어졌던 참사의 재현은 불보듯 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이다보니 다소 오버하는 듯한 정부의 대응이 꼭 필요할 것일 수도 있으리라.



특히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이 바로 코 앞에 다가왔고, 늘 이맘때면 사상 최대의 인구이동이 예상되기에, 관계 기관들은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자 장거리 이동은 되도록 피하라는 특단의 권고안을 이미 발표한 모양이지만, 거의 8개월째 심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자가 격리중인 일반시민 입장에서는 이런 추가적인 규제가 그동안 참아왔던 불쾌감과 짜증을 증폭시켜 거의 폭발 직전인 듯 보인다.

집안 어른의 병환으로 갑작스럽게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지 오늘이 일주일째, 여전히 2주간의 의무 격리를 묵묵히 수행중이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으로 입국시 통과한 공항, 방역 택시, 그리고 지역사회 보건소의 세심한 서비스 덕분에 견딜만 하지만 미국에서 살다보니 상대적으로 촘촘한 한국의 관리 시스템이 살짝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루에도 몇번 씩 전체 메세지로 들어오는 확진자들의 동선과 개인정보 노출은 그동안 집단의 대의를 위해 개인의 이익이나 권리가 침해되어도 참아왔던 과거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했다.

만일 내가 지금 미국에 있었다면 분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장례식이 열렸던 연방 대법원을 방문해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을 텐데, 그럴 기회를 놓쳐 많이 아쉬웠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다큐멘타리와 극영화로 만들어져서 외국인인 나에게도 익숙한데, 미국의 노동 계층에서 출생했지만 교육열이 강했던 유태인 어머니 덕분에 타고만 명민함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숙녀가 되어라(Be a Lady)라는 가르침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분노, 후회, 부러움같은 인간의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소비하는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담대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라는 뜻으로, 지금은 너무 식상해져버린 신사, 숙녀라는 단어가 원래 품고 있는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시차 때문에 동이 틀 무렵까지도 잠을 못 이룬 나는, 아파트 베란다 너머 여전히 밝게 빛나는 가로수를 응시하면서, 지난 밤 주문한 물품이 새벽배송으로 이미 도착한 택배물을 집안으로 들이면서 혼자 되내인다.

그래, 이곳은 한국이다. 세상이 미쳐 날뛰고, 불합리와 거짓이 만연한 현실이지만, 신사와 숙녀의 초심으로 이 지난한 시간을 맘껏 즐기겠노라고...


황훈정 작가, 전 치과의사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