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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In] 더 슬픈 미국판 ‘난쏘공’

“화도 안나?”

막내 영희는 큰오빠를 다그쳤다.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다 죽여버려”라고 주문한다. ‘꼭 죽여’라는 2차례의 다짐에서 억눌린 분노의 깊이가 칼날처럼 시퍼렇다.

1978년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작)의 한 대목이다. 1970년대 판자촌에 사는 ‘찢어지게 가난한’ 난쟁이 김불이(金不伊) 가족의 삶은 서글프다.

‘키 117cm, 몸무게 37kg’의 왜소한 체격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물려받았다. 그의 가난도 그렇다. 하수도 오물을 뒤집어쓰고, 부엌칼을 갈아주고, 건물 유리창을 닦으며 뼈빠지게 일해도 갈수록 더 궁핍해진다. 살던 판잣집마저 아파트 개발로 철거된다. 대가로 입주권을 받지만 입주비가 없다. 입주권은 결국 돈 있는 거간꾼의 차지가 된다.



인쇄공장 다니던 아들 둘도 해고된다. 불황을 명분으로 초과근무를 강요하는 사장에 맞선 대가다. 예쁜 열일곱 막내딸은 아버지가 판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 거간꾼에게 순결을 바친다. 딸이 몸값으로 입주권을 찾아왔지만 김불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굴뚝에서 투신자살한다.

‘난쏘공’은 30여 년 전 처음 읽었다. 군더더기 없는 짧은 단문 덕에 읽는 눈을 배웠다. 부와 가난, 계층, 착취의 현실적 뜻도 어슴푸레 이해했다. 어린 기억에 책이 박힌 가장 큰 이유는 ‘지옥 같은 불행’이 일상인 동네 이름 때문이다. 김불이 가족은 ‘낙원’구 ‘행복’동에 산다.

42년 된 소설 속 역설은 지금 낯설지 않다. 2020년 ‘천사의 도시’의 박탈감은 오히려 행복동보다 초현실적이다. 열심히 일해도 월세 내기가 벅차다. 보험이 없어 아파도 병원엘 못 간다. 집에서 쫓겨날 걱정보다 나라 밖 추방이 더 두렵다. 천사의 도시에는 낙원구 행복동에 없는 ‘색깔의 차별’까지 더해졌다. 피부가 검거나 누렇다는 이유로 난쟁이 김불이 대하듯 짓밟고 멸시한다. 그 차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하얀 거인’중 하나가 얼마 전 누군가의 목을 무릎으로 짓눌러 죽였다. 유례없는 전염병이 가진 자와 없는 자의 간극을 더 헤집어놓은 때였다.

분노는 당연했다. 국가가 공정하지 못할 때 개인은 스스로 복수에 나선다. 위험한 판단이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들고 일어선 이들의 고통을 알아주고 함께 아파해야 할 ‘거인 중의 거인’은 오히려 화를 부채질했다. 시위대를 ‘테러리스트’ ‘폭력배’라며 억압해야 할 적으로 불렀다.

약탈자들에게 경고할 목적이었다면 더 효과적인 방법도 많았다. 애틀랜타의 키샤 랜스 바텀스(50) 시장은 시위대 속에 숨은 도둑들을 사정없이 꾸짖었다.

‘우리가 이것밖엔 안 되나. 하나로 뭉친 시민이라면 이것보단 나아야 하지 않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암살당했을 때도 우린 이렇지 않았다. 이건 시민정신이 아니라 난장판(chaos)일 뿐이다. 당신들이 업소에 불을 지르면 우리 커뮤니티 전체를 불태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신들은 플로이드를 비롯한 모든 억울한 죽음에 먹칠을 하고 있다. 정말 미국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가서 투표하라. 11월 선거에 참여하라. 그게 이 나라를 변화시키기 위해 당신들이 할 일이다. (폭동은 그만두고) 제발 집에 가라!’

그의 따끔한 말들은 ‘당신들(you)'로 시작된다. 약탈에 가담한 이들뿐만 아니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을 꾸짖었다.

또 거인들 편에 서있는 이들에게 시위의 목적을 꼬집어줬다. 개중에는 “흑인들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어서다. 하얀 거인이 목을 눌러 죽인 살인 동기가 그 생각에서 출발했다.

우린 모두 미국에서 난쟁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작아졌다. 하얀 거인들이 넘지 못하도록 쌓아놓은 벽들 때문이다. 그 벽을 넘느라 우린 고통과 절망을 겪지만 지켜보는 거인들은 비웃고만 있다.

난쟁이들이 공을 쏘아올릴 때가 곧 온다. 11월 선거다. 그동안 투표에 관심없었던 이들에게 영희의 말을 떠올려보라 권하고 싶다. 화도 안 나나.


정구현 선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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