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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정전이 남기고 간 것

오연희 / 시인

바람 유난히 차고 기온 뚝 떨어졌던 12월 초 어느 하루 정전이 되었다. 변압기 교체공사 때문이라는 전력회사의 통지를 받았음에도 '하룬데 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집 안에 있는 일체의 전기제품이 작동을 멈춘 다음에야 전기의 의존도를 실감했다. 춥고 배고프다는 말이 사치인 줄 알지만 핑계 삼아 밖으로 나돌았다. 오후 5시, 정전해제 예정시간이 조금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동네가 온통 암흑 세상이다.

일찌감치 어두워진 날씨 탓에 길거리는 정적마저 감돌고 집안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차 있다. 전기가 들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다시 나가 저녁 사 먹고 마켓 가서 장까지 보고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캄캄하다. 이 상태로 밤을 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불안했지만 '나만 겪는 일 아니잖아!' 생각하니까 견딜 만한 일이 되었다.

스마트폰을 사용해 불을 밝히고 선물 받은 향초들을 찾아 불을 붙였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아무 생각 말고 기다리자 싶어, 어깨에 담요를 두르고 소파에 쪼그리고 앉았다.

생각해 보니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어디 정전뿐이랴 싶다. 연로하신 엄마한테 한달음에 달려가지 못하는 이국 생활, 헤어져 산 기간이 길어지면서 희석되어 가는 언니 동생들과의 애틋했던 자매애, 중병에 걸린 친구를 위해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냉정한 사실 등등. 마음 아린 일들이 떠오르더니 살맛 앗아가는 한국의 혼란한 정치 현실로 이어진다.



성탄을 상징하는 이름이 하나둘 사라져가는 미국사회 분위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메리 크리스마스'가 적힌 성탄 카드 구하려고 발품을 팔아야 했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명소로 알려진 옆 동네 입구에는 '크리스마스 라이트' 대신에 '할리데이 라이트' 푯말이 붙어있다.

아쉬운 순간들이 줄을 잇길래 계속 이러면 안 되지,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번쩍, 세상이 밝아졌다. 환한 세상이 어쩜 소리도 없이 이렇게 한순간에 오는 걸까. 마음 속에서 와~ 함성이 터져 나온다. 빛의 위력에 놀라고 늘 보던 집안 곳곳이 새롭게 살아난다. 어둠은 생각만 활동하게 하더니 빛은 생각이 구체화 되고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한참 움직이다 보니 밝은 생각들이 슬며시 밀려온다.

전화로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카톡이 있어 언니 동생들과 수다 떨 수 있고, 아픈 친구에게 음식과 말로 위로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우리나라도 인재가 나타날 거야 그럼. 크리스마스트리는 내 마음에 세우지 뭐. 한발 물러서는 생각과 함께 동동거리며 밀린 일을 마무리하는 사이에 밤이 깊어간다.

정전이 해제되기를 기다리는 어둠은 불안이었는데 잠자리에 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내린 어둠은 평안이다. 내일이면 생각도 나지 않을 일로 마음 졸이며 또 하루가 간다. 그런 날들을 거쳐 또 한해, 그 끝자락이다.

아무 일 없이 잠자리에 드는 것은 대단한 일이야. 매일 대단한 일이 일어나고 있군. 중얼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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