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넥타이 공장서 일했던 이방인…그가 그린 건 낙원

뉴욕 출신 김보현 100주년
서울 환기미술관서 기념전
해방 후 좌·우에서 고루 고초
50년대 미국행, 화업 이어가

화가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고학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곡절 끝에 원하던 대로 미술을 전공했다. 해방 이듬해 돌아와서는 조선대 미술대학 교수를 맡아 후학을 가르쳤다. 허나 좌우대립은 예상못한 시련을 안겼다. 여순 사건과 한국전쟁 시기에 때로는 좌익으로, 때로는 우익으로 몰려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

생전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구금과 매질, 고문을 당하며 그가 느낀 건 억울함이나 분노가 아니었다. 공포,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였다. 50년대 중반 미국으로 떠나게 된 배경이다.

55년 일리노이 대학 교환교수로 미국에 간 그는 2년 뒤 뉴욕으로 향했다. 넥타이 공장에서 단순 패턴을 그리는 일을 하는 등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힘겹게 살면서도 그림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한 뉴욕, 그런 뉴욕을 당시 휩쓸던 추상표현주의는 마침 그의 심리적 상황과 잘 맞아 떨어졌다. "억압과 생명의 위험이라는 과거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있었던 그 당시 추상표현주의가 무엇보다도 저의 심리에 가장 적합한 화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습과 전통을 반대하는 폭발적인 감정의 표현, 이것이 바로 제가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작가가 남긴 말이다. 이후 뉴욕에서 꾸준히 화업을 이어갔지만 한국에선 90년대 중반 첫 귀국전을 열 때까지 약 40년 동안 사라진 화가, 잊혀진 존재였다. 그의 이름은 PO KIM(포 김), 한국 이름 김보현(1917~2014)이다.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PO KIM, Then and Now'은 화가 김보현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다. 본관 전시실 3개 층에 이어지는 그의 그림은 시대별로 놀랄 만큼 변화무쌍하다. 뉴욕 생활 초기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강렬하고 자유로운 붓질이 두드러지는 반면 70년대 들어선 마치 새로 미술을 시작하는 듯 극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인 정물화가 등장한다.



이후로는 추상과 구상을 자유로이 결합하며 큼직한 화폭에 환상적인 세계를, 때로는 일종의 낙원 같은 세계를 펼친다. "고통스러운 그림은 그리고 싶지 않다"며 "내 자신이 고통을 많이 받았으니까"라고 했던 작가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노화가는 2000년대 이후에도 색테이프를 그림에 결합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전시장에는 그의 삶을 다룬 다큐 영상과 연보, 2014년 97세로 별세할 때까지 붓을 들었던 뉴욕 작업실을 재현해 놓아 평생 창작에 매진한 화가를 한층 가까이 느끼도록 한다. 조선대 시절의 동료였던 화가 천경자를 그린 드로잉도 눈길을 끈다.

화가 김보현은 68년 처음 만나 약 반세기를 함께하고 2011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이자 화가 실비아 왈드와 더불어 후대를 위한 중요한 유산을 여럿 남겼다. 과거 교수로 재직했던 조선대에 2000년대초 다수의 작품을 기증했고 두 사람이 살던 뉴욕 맨해튼의 건물에는 2005년부터 '실비아 왈드 앤 포 김 아트 갤러리'를 열어 한국 작가, 한인 작가를 포함한 전시를 열어왔다. 약 100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그의 구순 무렵인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회고전 이후 최대 규모다. 7월 30일까지.


이후남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