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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차로] 이 황량한 들판에서

이토록 아름답고 장렬하게 천지를 불태울 줄 몰랐습니다. 오색영롱한 잎새들이 형형색색 찬란한 빛깔로 눈을 부시게 합니다. 정말이지 온 세상이 가을 속에 풍덩 빠졌습니다. 주황이 물든 캔버스에 치자빛과 노랑을 팔레트에 풀어 덧칠하고 붓으로 빨강을 뿌리면 붉은 점들이 가을잎새로 돋아 납니다. 핏빛에 물든 암갈색 잎들은 쪽빛 하늘을 머리에 이고 떠날 채비를 합니다. 아름다운 것 행복한 것들은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만남도 사랑도 첫키스의 짜릿한 추억도 청춘을 불태우던 한 여름밤의 맹세도 우수수 지는 가을 잎에 묻혀 떠나갈 시간이 됐습니다.

가을 낙엽이 허전해 상심하는 그대여, 행복했던 시간에 굳게 잡았던 투박한 손도 이제 놓아줄 시간이 됐습니다. 서성이지 말고 떠날 수 있도록 매듭을 풀어주세요.

그저께 부동산 업자로부터 우리집을 살만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올해 연초에 샌디에이고로 이사 갈 작정 하고 그동안 집이 안 팔려 노심초사 했는데 기쁘기는커녕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한지요. 황량한 들판에 서 있는듯 가슴으로 삭풍이 몰아칩니다. 뻥 뚫린, 껍데기만 남은 빈 몸은 겨울 문풍지 마냥 떨립니다.

평생 처음 집을 장만하던 날은 가슴에 프로펠러가 달린 것처럼 하늘을 붕붕 날아다녔어요. 길 이름이 '초원의 미로'인 아담한 집에서 심장수술로 풀잎같은 딸애 목숨 지켜내고 리사 아빠를 식도암으로 보냈습니다. 그 집 팔고 하루 종일 울면서 낙엽이 발목을 덮는 가을길을 헤매고 다녔어요. 펑펑 울어 앞이 안 보이고 운전 조차 힘들어 가을 숲을 오락가락 했습니다. 벗은 나무들은 '뒤돌아 보지말고, 앞만 보고, 너무 힘들면 쉬어서 가고, 막히면 돌아서 가고, 내민 손 뿌리치지 말고, 주저 앉지말고, 길을 따라 내일로 가라'고 쇠소리 내며 가슴을 때렸습니다. 벗은 나무들은 손 꼭 잡고 서로 부등켜 안고 겨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모질게 아프고 앞이 안 보이던 청춘의 봄을 땅에 묻고 초원의 집을 떠났습니다.



아! 그리고 뜨겁고 폭우 쏟아지는 한 여름 밤의 세레나데. 우서방 만나 죽자사자 일해 레스토랑 7개를 오픈했습니다. '등대길'이란 팻말 붙은 길에 직접 도면 그려 꿈같은 집을 짓고 세 아이 키우고 어머님을 떠나 보냈습니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긴 세월 동안 귀뚜라미 마냥 두 날개 비비벼 애들이 찾아들던 등대길의 우리 집!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를 혼자 불러봅니다. 반딧불 잡으러 뒷마당을 쫓아다니던 아이들의 웃음 소리와 죽은 무당벌레 찾아내 장례식 치러주던 기억, 어머님 방 앞에 아름드리 자란 백목련 향기를 다시는 맡을 수 없겠지요. 마지막은, 이별의 추억들은 낙엽처럼 이렇듯 황량하게 사라지는군요.

아름다움이 슬픔이 되는 줄 예전엔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시간보다 작별하는 시간이 더 많은 줄도 몰랐습니다. 즐겁던 날보다 아픈 날들이 더 많았다해도 삶은, 살면 살아지기에 견디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했으므로 행복했습니다.

그대여! 지금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를. 헤어져도 사랑하기를. 사랑하는 법과 이별 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가을 잎새는 저리도 빛나며 타오르고 있지 않나요. 이별이 힘겨워 껴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사랑의 입맞춤은 늘 달콤합니다. 작별은 잠시 눈을 감는 것. 눈을 뜨면 낯선 땅, 황량한 들판, 지구의 어디쯤 또다른 세상에서, 다정한 낯빛 따스한 숨결에 익숙해지는 그런 날이 다시 오리니.


이기희 / 윈드화랑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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