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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문패

“나의 큰오빠를 기다렸다.
엄마의 깊이 파인 우울과
아버지의 침묵은 당신들이
가슴 깊은 곳에 감추고
되새김질하는 아픔이었다”

올해로 6·25 동란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었다. 나는 당시 걸음마를 시작하고 겨우 혼자 걸을 수 있던 나이였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란을 가던 길은 멀고, 힘든 고통의 길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에 내가 한 수를 더했다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는 들어서 알고 있다. 등에 피란 보따리를 멘 아버지는 늦둥이인 나를 목말을 태우고, 식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가끔 아이의 몸무게에 짓눌릴 때 나를 길에 내려놓고 혼자 걸어가 보라고 하셨던 모양이다. 나는 남쪽을 향해서 대이동 하고 있던 군중을 거슬러, 오던 길을 뒤돌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곤 했다고 한다.

6·25 동란. 참으로 많은 상처를 남긴 한국인의 내전이었다. 화약 연기 자욱한 파괴된 건물, 깨진 도로, 불타고 남은 잿더미 사이를 인도해 주는 사람 없는 대열에 끼어 끊임없이 남쪽으로 걸어서 이동하던 아버지와 식구들, 말 안 듣던 어린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종전되어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 친구 집에서 하던 더부살이를 끝내고,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큰오빠가 없는 큰오빠의 가족, 올케언니와 두 조카도 합류했다. 깨어진 창문들, 지하실 벽에 쓰여있던 빨간 슬로건 낙서는 가끔 들르는 아편쟁이 거지 아줌마가 뒤집어쓴 회색 담요처럼 매서운 겨울바람을 막아줄 수 없었다.

식구들은 참전했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조카의 아버지, 나의 큰오빠를 기다렸다. 엄마의 깊이 파인 우울과 아버지의 침묵은 당신들이 가슴 깊은 곳에 감추고 되새김질하고 있는 그들의 아픔을 감추지는 못했다. 어린 우리는 큰오빠에게 어떤 극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큰오빠의 이야기나, 그에 관한 상황을 묻지 않았다. 집안을 뛰어다니지도, 크게 웃지도, 큰 소리로 말하지도 않았다.



큰오빠가 돌아올 곳은 현관이 한쪽 편에 치우쳐 있던 집, 현관이 있는 쪽에 위치한 대문에 문패가 붙어있던 그 집밖에는 없다고 식구들은 믿고 있었다. 부산에서 돌아온 후, 대문과 대문 쪽에 있는 현관문, 응접실, 서재는 큰오빠의 방과 함께 사용되지 않고 항상 닫혀 있었다. 식구들은 현관의 반대편 쪽에 있는 부엌 가까운 곳의 쪽문을 사용했다.

나는 가끔 안방과 부엌을 빠져나와 삐끄덕거리는 낡은 복도를 지나서 어둠이 가득 찬 내가 ‘그곳’이라 부르던 대문 쪽에 있는 방들을 비밀리에 방문하곤 하였다. 창문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방안의 모든 것들은 어둠 속에서 숨 쉬는 것을 잊은 듯 적막했다.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방, 움직이는 것들이 기다리다 지쳐서 메말라 버린 방, 생사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방들이 있는 ‘그곳’은 항상 고요했고 때로는 신비로웠다. 어쩌면 부모님들에게 그곳은 신성한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계셨다. 그러고 한참을 서서 당신의 이름 석 자가 쓰여있는 낡은 문패를 올려다보셨다. 6·25 동란에 용케 살아남은 나무 쪽판. 거기에는 아버지가 손수 먹을 갈아 쓰신 당신 이름 석 자가 단정한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즈넉한 아침이었다.

아무 집에서도 조반을 차리지 않는 듯, 물 트는 소리나 그릇 부딪치는 소리조차 없었다. 뒷마당 멀찌감치에 서 있는 아카시아 고목이 늙은 몸을 뒤틀면서 밖으로 내쫓아 버린 울퉁불퉁한 가지에다 하얀 꽃 뭉치들을 매달고 있었다. 갑자기 세상이 낯설어 보였다.

아버지는 천천히 문패를 떼어서 내리셨다. 언니가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아버지, 큰오빠가 우리 식구들을 찾아올 수 있을까요?”

“…….”

“문패가 없으면 우리가 이사 간 것을 알겠지요?”

“…네 오빠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큰오빠가 자신의 때 묻은 책들과 냄새를 남기고 간 집, 스물 몇 살 아내와 두 딸이 기다리고 있는 그 집을 큰오빠의 아버지는 지키지 못했다. 가세가 기울어 아버지는 서울 변두리에 작은 집을 장만하셨다. 새파란 나이에 과부가 된 올케는 분가했다.

올케는 평생 혼자 살았다. 올케네 집 현관에는 언제나 군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나는 성장할 때, 성인이 된 후에도 엄마와 아버지가 크게 웃으시는 것도, 소리 내어 우는 모습도,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현충원에는 큰오빠의 빈 무덤이 있다. 큰오빠는 경상북도 어느 고지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오빠는 유해를 찾지 못한 12만2609명 전사자 중의 하나이다. 그를 가슴 깊이 묻고 살아가던 올케, 아버지, 엄마도 모두 이 세상에 없다.

쉽지 않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만 잘 살아 낼 수 있다고 눈총을 주던 문패 속의 세 글자.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세상을 내다보고 있던 군모 쓴 젊은이. 그들은 오래전 나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큰오빠를 다시 보지 못했던 문패와 사진 속의 그 젊은이는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숨 쉬고 있다.


전월화(모니카 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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