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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문학마당]"이민 30년을 뒤 돌아보며"

조직신학 교수였던 미국 여자 교수님, 병원 원장이신 고모부님을 통하여 알고 있는 미국은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학생비자나 투자 이민으로 올 수 없는 나는 미국 백인과 결혼하여3월26일 1982년에 미 공군 군용 비행기를 타고 러벅(Lubbock)텍사스에 왔다. 콜시케나(Corsicana Texas)에 살고계시는 시부모님이 운전도 못하는 나에게 선물이 준비했는데 브라운 뷰익(Brown Buick)자동차였다. " Welcome to America, Welcome Home!" 그리고 꼭 껴안아 주셨다. 회사원인 아버지와 수간호원 어머니 나에게 딸처럼 잘 대해주셨다. 두 시동생 역시 동양여자인 나를 잘 따라주었다.

러벅으로 향하여 이민 생활이 시작되고, 남편은 뷰익을 타고 나는 케디렉(Cadillac)과 예쁜 집도 사주었다. 러벅 한인교회를 참석하며 공군으로 1년 기간을 마치고 남편은 텍사스 텍(Texas Tech) 학교를 복학했다. 나는 기독교 대학에 다니면서 텍사스 인스트먼트(TI)일하며 살아가는 동안 남편이 학교에서 만나는 여자를 발견하고 이혼 서류를 넣고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그러는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 하여 아직 끝나지 않은 이혼 서류를 취소하고 함께 지내기로 결정했다. 잠시 헤어져 지낸 남편은 음주 운전으로 열세 대 러벅 경찰차가 부서지고 러벅에서 뉴멕시코까지 신호등 무시하고 저녁내 달려간 72개의 티켓이있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남편은 아이낳기 일주일 전에 집에 도착했다. 시어머니가 받아준 첫 딸 제니스를 낳았다. 시아버지는 아이를 낳다 는 소식을 듣고 미역국을 끓여서 병원으로 가지고 오셨다. 키가 장대만한 노인이 뜨거운 미역국을 들고 오시는 모습이 지금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고 웃음도 나오는 기억이다.

콜시케나에 한인이 운영하는 아파트 주인을 만나 달라스로 왔다. 1986년 달라스 이민이 두 번째로 시작되었다. 남편은 공부하여 비행 정비, 비행검사, 조종사 면허까지 모두 취득하여 넓은 집도 준비되고 둘째 딸 미셀도 달라스에서 낳았다. 남편이 네 번째 음주운전 이번에는 다른 곳에 있는 형무소로 갔다. 두 딸들은 시부모님이 맡아 기르기로 하고 엄마인 나는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어 결국 보내야만 했다. 그래서 1993년 3월 갈랜드 집에서 모두 헤어지게 되었다. 올해 4월에 펴낸 제 시집 “살구꽃 피는 내 고향” 이란 책 p.90 에 “두 딸” 이란 시는 그때를 그리면서 적은 시다. 갑자기 없어진 가족 때문에 심각하게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으나 한국에서 마치지 못한 신학교를 졸업을 하고 전도사가 되었다. 국제결혼하고 이혼한 여자 전도사라고 사람들은 속삭였다. 신학교에서 만난 형제는 영주권을 얻고자하였고 그 방황 속에서 지쳐 학교를 휴학했다가 1년 후 다시 대학원에 복학하여 기독교교육학을 졸업했다. 교회에서 함께 전도사로 일하면서 만나게 된 노총각은 학교와 교회 직장을 다니면서 살아가는 이민 1.5세였다. 그 전도사는 정신병자 어머니와 20년을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4년 동안 데이트하다가 결혼식 하는 날 전도사님과 목사님들이 오셔서 결혼식을 축하해주었다. 아울러 평생소원이었던 하얀 웨딩드레스도 입어보았다. 결혼 후, 다니던 유치원교사를 그만두고 정신병자 시어머니를 보살피게 되었다. 어머니는 회복되어 돌본지 1년9개월 만에 한국으로 나가셨다. 어머니가 어지럽힌 집을 1년에 걸쳐 새로 꾸미고 단장하여 중년의 신혼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2004년에 신학원을 마치고 군목으로 봉사하면서2008년에 교육학 박사를 받았다. 남편 역시 대학원 다섯 개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고 2009년에 컴프터 박사를 했다. 노총각과 이혼녀의 삶, 노총각도 사연이 있고 이혼녀도 사연이 있는지라 서로 친구와 동역 자되어 잘 지내고 있다. 전도사로 만나 이제는 부부목사 부부박사의 신분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두고온 두 딸아이들 교회에서 다른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동안 나는 하나님이 직접 두 딸을 교육시켜 달라는 기도를 매일 드렸다. 다행히 두 딸들은 모두 첫사랑으로 결혼하여 엄마 보다 더 좋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큰 딸애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둥대며 살아온 30년 세월 할머니라고 부르는 나이가 되었나보다.

불교집안에서 핍박으로 자란 나의신앙, 강을건너 산길따라 철로따라 십리길 찾아나선 시골교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뭉클하고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그러므로 자녀교육이 신앙 안에서 잘 양육되고 성장하도록 부모와 교회가 맡은 분야를 잘 감당해주었으면 한다. 이것은 자녀들 미래와 구원이 연결되어 있는 신앙교육이기에 매우 예민하고 중요한 역할이다.



이민 30년, 26년 동안 변화된 달라스를 본다. 한인들도 교회도 비즈니스가 많은 것이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그동안 달라스 이민생활을 함께한 여러 친구들 전도사 목사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때로는 잊고 살고 때로는 스쳐가는 기억 속에 울고 웃는 그 모습들 모두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그동안 경험을 거울삼아 소금과 빛의 역할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민미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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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루이지애나 대학에서 신학(Th.B)과 기독교교육학(M.R.E)을 졸업
미드웨스트 대학에서 신학(M.Div)과 기독교교육학(D.C.E)졸업.
미 군목협회회원, 미 조종사협회회원, 한국기독교작가회원, 달라스 문학회원
현제 텍사스 공군 일반 예비역 군목(달라스 중대 소속)
저서 “살구꽃 피는 내 고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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