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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내 마음속의 풍경

나이가 들어 이제 회상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어린 시절 방학 때면 방학책 겉표지에 그려져 있던 한 폭의 수채화 그림이 늘 내 가슴속에 남아있다. 몇 그루의 미루나무 위에 흰 뭉게구름이 걸려있고 하얗게 부서지는 웃음을 날리며 홍조 띤 아이들이 잠자리 채 같은 걸 가지고 무엇인가 수집하려 좁은 농로를 따라 걸어가는 그런 그림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이 무엇인가에 쫓기는 심정일 때 그 그림을 생각하면 까닭 없이 느긋하고 한가로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또 하나 더 연상되는 기억은 역시 방학 때 찾아간 어느 시골의 모습이다. 녹음이 우거진 염천의 하늘 밑에서 조붓한 길을 따라 멀리서 사람은 보이지 않은 채 집채만한 커다란 지게 풀섶만이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언덕을 넘어 사라지던 모습, 사라지고 난 후의 그 묘한 아련함이라고나 할까. 아득한 삶의 부하 같은 것이 어린 내게도 전해져 그 후로 내가 삶의 신산스런 굽이를 돌 때면 용케도 건들거리며 사라지던 풀섭 지게의 모습이 한 폭의 애잔한 마음속 풍경으로 떠올랐다
그 이후 더러 성의 없는 밥상머리에서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찬물 마시듯 소주를 마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라든지, 30여 년 전 이민 와 처음으로 겪은 우체부 배달직 훈련 3일째 망아지만한 개에 쫓겨 줄행랑을 놓던 내 작은 모습에서도 나는 그 풀섭 지게의 풍경을 떠올리며 제법 향수와 같은 용기를 얻곤 했다.

누가 해도 천박하게 들리는 이른바 ‘먹고 산다’는 말, 그 행위의 집행만큼은 너무 고지식하여,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한 끼니 앞에 진실로 무력하였다….

듣기 좋은 위로처럼 들리겠으나 호랑이도 함정에 빠지면 꼬리를 흔들어 밥을 구한다 들었다. 엉뚱한 전용(轉用) 같지만, 냉정한 법마저도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행한 살인조차도 정당방위라는 이름으로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것도 기억할만 하다. 또한 역사적 영웅들도 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도 막부를 세워 근세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도 다키다와의 한판 대결을 가르는 고비에서 도망을 치는데 나중에 보니 얼마나 줄행랑을 볼품없게 쳐놨던지 말안장에 생똥을 싸붙였고, 조조도 마초에 쫓길 때는 붉은 전포와 투구를 벗어 던지고 얼른 수염을 잘라 졸장들 틈에 끼여 위장함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살아남아 금박 먹인 명함 하나 못 갖추며 살았고, 가정을 일구어 아이들을 성공 가도로 몰아넣지도 못했다. 게다가 삶의 윤리마저도 적당한 비겁과 소심으로 살아왔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로 보면 우린 그때그때 나름 진지하고 대체로 성실했으며, 최선이라 여긴 일을 하며 산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그리 큰 부끄러움은 아닐 것이다. 삶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경작과 같아서 사람이 하는 역할이 있고 하늘이 하는 몫도 엄연히 있을 것이다.

 설사 내 바람이 맞아 떨어지지 않더라도 하늘을 우러러 원망함도, 땅을 굽어 서운함도 이제 의미가 없다. 우리가 겨누고 있는 것은 한 점 흠결 없는 ‘완벽한 삶’이 아니라, 엎어지고 넘어지되 얼마나 실하게 일어나 앞으로 나아 가느냐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느닷없지만 우주의 섭리가 있으므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하늘이 그렇게 시리도록 푸르고 강물은 하염없이 도도하며 바다와 산이 이토록 의연할 수 있단 말인가….

김준혜/부동산 에이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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