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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문학마당]매운 맛이 워뗘

[텍사스 중앙일보] 발행 2012/05/18 미주판 0면 기사입력 2012/05/17 15:42

김하늬

김하늬

우리 집 근처 아파트에 사시는 통통이네 할머니가 환한 대낮에 서리 맞은 얼굴로 들어 오신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어이구 애기 엄마 말도 마유. 우리 집이 시방 물바다니께에”
갑자기 윗층에서 변기라도 고장이 났는지 천장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는 것이다. 관리실에 가서 후딱 좀 고쳐달라고 통통이 아빠가 가고, 엄마도 가고, 형까지 가서 벌써 몇 차례 볶아 쳤는데도 여지껏 꿩궈먹은 소식이라며 분통을 터뜨리시는 할머니. “얼추 일주일이 넘었남? 첨이는 쪼매씩 떨어지등만 인자는 바닥이 한강이라니께에. 다들 일나가고, 핵교가고, 아무도 없는디 워쪄야 좋남. 내가 말만 되믄이유 진작 쫓아가서 미국 놈들 혼구녕을 냈을 틴디 당최 말을 할 줄 알아야지이” 말씀인즉슨 나더러 관리실에 같이 가서 사정얘길 좀 해달라는 거였다. 난 통통이놈을 들쳐 업고 씩씩거리며 앞장서신 할머닐 따라갔다.
관리실 여직원은 우릴 한 번 쓱 훑어보고는 전화받고, 팩스 받고, 지 할일 다하고 나서 큰 인심 쓰듯 얘길 들어줬다. 그러고는 서류를 건성으로 들춰보더니 접수된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아직 차례가 안 되었으니 가서 기다리라는 답답한 소리만 했다. 할머니네 사정이 급하고 딱하니 먼저 처리해주면 안되겠냐고 정중하게 다시 한 번 부탁했지만 차례를 기다리라는 하나마나 한 소리만 되풀이 했다.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다. 눈길 한 번 제대로 안주며 대하는 여직원 때문에 은근히 심사가 뒤틀린 데다 선뜻 사실을 말씀 드리기가 딱해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통통이네 할머니가 바싹 다가왔다. 할머닌 간첩 접선하듯 시선은 딴 델보며 입도 안 벌리고 재빠르게 속삭였다. 그 느리디 느린 충청도 양반이 어찌나 잽싸던지 하마터면 못 알아 들을 뻔 했다.
“잉 그라니께 시방 안 된다는 그 소리쥬? 나가 말은 못 혀도 눈치로 감 때려잡았시유우. 흥, 요것들이 시방 우릴 무시허는 것 아닌감? 짠지 먹고, 된장 먹고 자란 조선 토종고추 매운 맛을 봐야 쓰것남? 애기 엄마! 놀라들 말고 기냥 내 하는 양만 보고 있시유, 알것쥬?” 어디에다 그런 배짱과 힘을 숨겨놓으셨을까. 할머닌 갑자기 벽력같이 호통을 치셨다.
“누구여 누구! 여그서 제일 높은 눔이 누구여어. 내가 담판을 질 모양이니께 싸게싸게 나오드라고오. 이눔들, 우덜 얼굴이 노랗다고 시방 차별허는 겨!”
때아닌 할머니의 고함에 눈이 동그래진 여직원이 그제사 제대로 얼굴을 뵈주며 지금 저 노인네가 왜 저러냐고 물었다. 나도 분이 나서 다소 격앙된 어조로 여직원의 태도부터 지적하고 자초지종을 말하는데 마침 그 때 매니저가 들어오다 내 얘길 들었다. 할머니의 느닷없는 방약무인(?)한 행동에 난 혹시라도 그들이 불이익을 줄까 봐 은근히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그런 예를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그때그때 감정을 드러내며 솔직히 대처하지 않고 이 미국 분들은 나직나직 웃어가며 말해놓고는 뒤에 가서 소리 없이 뒤통수를 치곤 했다. 예를 들자면 통통이네가 만약 이살 가게 되면 아파트 수리비조로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 엄청난 청구서를 들이밀 것이다. 억울하면 변호사를 사서 법정까지 가야 하는데 그 비용과 시간적 손실을 따지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니까 대부분 포기하고 내버린다. 또 안낼 수도 없는 것이 그 놈의 크레딧이라는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나빠진 크레딧은 모든 사회활동에 제약이 되므로 할 수 없이 억울해도 내고 마는 것이다. 교묘한 사회제도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가 어디 한 두 번이던가? 어디 그뿐인가? 자칫하면 할머니를 정신병자로 몰아 경찰을 부를 수도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난 아는 게 병이라고 끓어오르는 부아를 감추고 한껏 예의를 갖추어 다시 한 번 설명하려 드는데 “무슨 소리냐. 우린 인종차별 같은 거 한 적 없다”며 매니저는 타고난 우리 얼굴색보다 더 샛노래져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인종차별 사건이 관계기관에 고발되면 심각한 인권유린 문제로 다뤄지기 때문에 무척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눈치, 코치, 염치 삼 단인 할머닌 그에 힘입어 기세를 몰아붙였다. “네 이눔! 이 것이 차별이 아니고 뭐여어. 니도 눈있으믄 와서 보면 알 것 아닌게벼어”
무작정 매니저의 손을 잡아 끌고 투사처럼 나가시는 할머니. 얼떨결에 쩔쩔매며 끌려나가는 매니저 꼴이 쌤통이었다. 나도 포대기를 바싹 조여매고 잰 걸음으로 따라갔다. 돌연, 싸우면 싸우리라 결연한 의지까지 생기며 절로 걸음에 힘이 주어졌다. 등 뒤의 통통이놈은 멋도 모르고 신이나서 더 빨리 달리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통통이네 아파트 안.
의기 충천한 할머니는 매니저를 다짜고짜 카펫 위로 눕히려 드셨다. 그 행위만 보면 머리 허연 노인네가 젊은 남자를 성폭행하려 드는 우스꽝스런 희극의 한 장면 같아 그 와중에도 쿡쿡 웃음이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카펫은 물이 질펀했다. 젖을까 봐 보따리 보따리 책상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은 장마철 물난리 통의 이불 보퉁이처럼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천장에서는 처마끝의 낙수처럼 물이 쉴 새없이 떨어지고! “자 누워봐아아, 니눔도 누워봐야 속을 알 것 아니여어. 그래, 니 눈으로 보니께 워뗘, 이눔아. 이래도 차별이 아니여어? 순서고 나발이고 니눔같으면 하룻 저녁이나 여그서 자겄냐아? 니눔도 부모가 있실거 아니여어. 그래 니눔 부모 집이래두 순서가 안됐다고 손 놓고 있었을껴어? 어디 의사가 입원한 순서대로만 치료한다드냐. 숨 넘어가는 놈이 있시믄 그 놈부터 살리고 보는 게 인지상정이지이. 순서는 뭔 놈의 순서여어어”
할머니의 무차별 공격에 이 번엔 매니저가 눈치코치로 할머니 말씀을 감잡은듯 무조건 ‘오우케이’ ‘오우케이’를 연발하며 수습하기 바빴다. 금방 기술자를 데리고 오겠다며 큰 키를 휘청거리며 꽁지에 불붙은 듯 내빼는 매니저. 눈이 마주친 할머니와 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할머닌 조선 토종고추 매운 맛을 제대로 보여주셨다. 그 날로 당장 통통이네 집은 뽀송뽀송 진자리가 마른자리 되었기 때문이다. 아아. 위대한 한국의 노인이시여! 젊은 것들이 어줍잖은 지성과 교양으로 몸 사리느라 일을 그르치고 있을 때 할머니의 단순 명료한 사고는 정면돌파라는 용기를 택했고 단번에 일을 해결해버리신 거였다. 말한마디 통하지 않는 입장에서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건 노인의 특권같은 것이기도 했다. 노인이었기에 앞뒤 안재는 큰소리가 가능했고 노인이었기에 상대방도 어느 정도의 무례와 생떼 같은 주장을 용납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할머니의 깨끗한 케이오승! 아름답고 통쾌했다. 득의만만해진 할머니가 특유의 느릿한 어조로 내게 하신 승리에 찬 소감 한마디.
“애기 엄마, 내가 워떤 사람인지 봤지유우? 어려운 일 생기믄 나헌티 얘기햐아. 내가 당장 해결해 줄 모양이니께에”

김하늬 수필가. 달라스한인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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