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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스 문학마당]네번의 울음

아주 오래전, 한 아이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지금 막 떠난 버스를 보며 땅바닥에 퍼져 앉아 울다가, 성질에 못 이겨 입고 있던 셔츠를 잡아당겨 찢기도 한다. 그 꼬마는 뭔가 원통한지 계속 울다가 일어나선 산길로 달려갔다. 그 꼬마가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도착한 동네는 엄마가 사는 동네였다. 꼬마가 엄마 찾아 걸었던 길은 한적하고 고요했으며, 산모퉁이 돌때마다 산기슭에 옹기종기 부락을 이뤄 살던 평화스런 곳 이었다 지금은 이율곡의 묘소가 있는 동네까지 시멘트로 포장되어 관광지화 되었는데. 아직도 그 시절 평화롭던 풍경이 아쉽게 남아돈다. 아무튼 아이를 데려갈 수 없는 처지 때문에 아이를 떼어놓고 속상해하며 온 엄마는, 거기까지 거지꼴을 하고 온 아이를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막 두들겨 팼다.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엄마와 떨어져 살다보니 모처럼 다니러온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 울던 아이를, 야박하게 떼어놓고 떠나간 엄마의 잘못이지 아이의 바람이 혼나야 할 일인가? 벌써 오십년 전,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 흠신 두들겨 맞던 아이가 바로 나였다. 엄마와 관계된 일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첫 번째 울음이다.

두 번째 나의 울음은 바로 1968년 1. 21사태 당시다. 나에게 인생을 전, 후반으로 나누는 기점이 되는 ‘해’ 이기도하다. 그때 나는 경향신문을 배달하고 있었는데, 1.21사태 때문에 신문이 잘 팔렸고 한부에 십 원이었다. 그 유명한 ‘김신조’ 란 사람이 포함된 ‘북한 특수부대’가 비자 없이 입국을 ‘파주’로 했고, 출국도 ‘파주’로 하면서 얼어 죽고 총 맞아 죽고 할 때다. 북한 특수부대는 국군에 쫓겨 내가 살던 동네근처로 퇴각을 시도했지만. 남파된 31명중 한명은 체포됐고 두 명 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간 걸로 알며, 나머지 전원은 사살됐다고 한다. 지금도 ‘MEXICO’ 나 ‘CANADA’ 국경을 VISA 없이 그냥 넘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아마도 그들 선구자들의 책임이 아닐까? 그때 우린 한 시간 정도는 보통 걸어 다녔는데, 그 무렵에는 상당히 위험지역이라 컴컴한 저녁때 혼자 산길을 걷기엔, 엄청 무섭기도 했다. 아무튼 나라 정세가 어수선한 가운데 나는 학교 때문에 1월 26일인가 28일 날 ‘소사’ 로 혼자 가게 되었다. 파주 ‘밤고지’에서 합승을 타고 떠날 때 남겨진 엄마를 보며, 영영 다시는 못 볼 듯이 뒷좌석에서 엄청 울면서 떠나야했다. 왜 항상 떠나야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몹시 서러워 마냥 울었다. 그때, 참! 많이 울었다. 울고, 울고 또 울었지만 ‘임진강’ 강물이 불어나는데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도 그 서러운 감정 때문에 울컥하는 기분이 든다. 정말 떠나며 많이도 울었다. 그것이 나의 두 번째 기억에 남는 울음이다. 그 시절엔 한 집이 이사 가면 온 동네 아낙들이 울던 정겹던 시절이다. 참 정이 많은 세월 속에 나도 있었다.

(떠남)
떠남은 눈물이어라
남겨진 사람의 눈물은
기억에 없고


떠나며 흘린 눈물
아직도 젖어있어
과거 속
내 눈물
마르지 않고
아직도
나그네
길을 떠난다.

자!
오늘도
누가 우나
염려치 말자
내가 울다
네가 울다
함께 울어도
세상은
그냥 있고
너만 아프다.

세 번째 나의 울음은 얼마 전 한국 갔다 와서다. 직장휴가가 일 년에 두 주 뿐이라 겨우 친구들 얼굴보고 볼 일 보러 왔다갔다 하다보면 결코 긴 시간은 아니다. 아무튼 한국가려면 휴가를 두 번 모아서 천천히 여행도하고 조용한 ‘절’에서 이삼일 정도 지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번 여행은 동행이 있어 ‘제주도’까지 갔다 오는 호사도 누렸다.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같이 간 동생이 도움을 주어 고맙게 지내다왔다. 일가친척이 없으니 인사 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럭저럭 아는 사람 만나야하니 2주 휴가는 시일이 급박하다. 삼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지만 집에서 밥 한 끼 안 먹고 왔다. 밥상을 힘들게 차릴 수밖에 없는 시각장애 1급인 엄마가 마음에 걸려 아침에 집에서 커피만 마시곤 나가서 밥을 사먹곤 했다. 밥상 차려 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 또 배도 그리 고프지 않아 그랬다. 가끔은 엄마를 위해 내가 상을 차리고 싶었지만 당신께서 홀로 익숙한 자신만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글쎄, 밥 한 끼 차려 드리는 것 도 쉽지 않으니 ‘효’ 란 진정 어려운 모양이다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집에서 기르는 개다. 생면부지인 나를 처음 보는데도 전혀 경계심을 갖지 않았지만, 내가 살갑게 다가서면 뒤로 멈칫 물러서는 야릇한 놈이었다. 항상 대문 옆에 굵직한 체인으로 묶여져있는 개를 볼 적마다 펀한 마음이 아니었다. 어릴 적 동네에선, 온 동네 개들이 눈밭을 자유롭게 뛰어 놀던 광경이 자꾸 떠올랐다. 그래서 미국 오기 전날 밤, ‘개’ 산책시키기로 한 다짐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그날 밤 나는 어마어마한 고생을 자초하고 말았다. 나의 호의를 전혀 모르는 ‘개시키’는 괜스레 무서워하며 옆에서 따라 걷는 게 아니라 자꾸만 나를 피하며 논 옆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하! 개시키 내 인내심 점검 했었나?) 나는 금세 폭군으로 변해 줄을 확 잡아채 끌어 올린다는 것이 반대편 도랑으로 넘어가며 개가 줄에서 빠져버린다. 어어! 하는 사이에 ‘개시키’는 소림사 36계를 배웠는지 줄행랑을 놓는다. 어둠속으로 도망간 개는 하필 검정개이니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찾아보다, 본격적으로 찾기 위해 빈 줄 들고 집에 들어서며, “개 도망갔어!” 하는데 참 난감하기가 말 할 수 없었다. 그 길로 나가서 어둠속 벌판을 아마도 한 시간 정도는 헤매고 다녔다. 보통 그럴 경우 개는 집으로 내 달려 오는데 족보 없는 개라 그런지 집에 오지도 안했다. 결국 못 찾고 밤새 마음고생하며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새벽 여섯시에 또 찾아 나섰다. 그런데 집을 나서서보니 길 건너 밭에서 개가 왔다 갔다 한다. 내가 부르면 올 줄 알고 부르니 냅다 줄행랑을 친다. 어이쿠! 안되지 하며 집으로 달려가 엄마를 모시고 나갔다. 나는 저만치에서 있고 엄마가 그 녀석을 부르니 지옥에서 부처님 본 듯이 달려온다. (베라 묵을 개시키 별난 일로 밤새 고생시키고 그래!) 아무튼 미국으로 떠나기 두 시간 전 다행히 붙잡아서 매놓고 올 수 있었다. 아침 여덟시, 그렇게 소란 떨다 막상 떠나려니 마음이 심란하고 난감했다. 왜, 나는 또 떠나야만 하고 엄마는 언제나 뒤에 남겨져, 내 맘 속에서 마냥 서성이고만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차에 올라 엄마를 보니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어디다 둘 줄 몰라, 망설이는 모습을 보니 너무 힘들다. 엄마가 인천공항까지 갔으면 하는 바람도, 집에 오기 힘드니까 관두시라며 만류해야하는 내가 야속하겠지. 이럭저럭 속상한마음 때문에 떠나는 나도 힘들고 남겨진, 엄마도 많이 힘들어 하려니 생각하니……. 그래서 엄마는 아들 미국 갈 때 한 번도 공항에서 배웅을 못했다. 언제나 마음이 무거워져서 떠나야하는 신세가 야속할 뿐이다. 아무튼 무사히 미국에 도착하여 전화로 잘 도착했음 을 알린 후. 나는 남겨진 여행의 끝부분을 위해 PANAMA CITY, FLORIDA 로 동행했던 동생을 태우고 떠났다. 나는 차 여행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번 여행길은 시차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고, 밤에 길을 헤매게 되어 몇 시간을 허비하곤 예정보다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거기서 이틀을 쉬다, 혼자서 운전하며 다시 집으로 왔다. 운전 중 휴식도 취하며 왔지만 피곤이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석양 무렵 LOUISIANA 경계를 넘어 TEXAS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이제 세 시간 정도만 운전하면 집이니 마음도 놓인다. 여행 중 타주 경계를 넘어 TEXAS에 들어서면 내 동네에 다 온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하다. 하지만 텍사스 주 문턱에 들어섰어도 El Paso 에서, Dallas 까지는 10시간 정도는 걸린다. 참 Texas가 크기는 크다. 한국서 사갖고 온 옛 가요 CD를 조용히 들으며 다시 운전을 하다 보니, 어느덧 노랫말에 감정이 복받치며 서성이던 엄마의 애처롭던 모습 때문에 나도 모르게 사정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석양빛 서러워, 혼자서 외로워, 노래가 슬퍼서, 엄마가 외롭다는 말 때문에, 모든 게 설움 되어 나는 울었다. SUN GLASS 밑으로 흐르는 눈물은 쉬지도 않고 흐르고, 노래도 흐르고, 차도 흘렀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울 수 있어 착잡한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 놓은 것 같다. 때론 실컷 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내 기억에 새겨진 세 번째 울음이었다.

나의 네 번째 울음은 언제가 될지 모른다. 아마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울음을 토해내야 하지 않을까……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위안을 갖는다. 그러나 막상 그 일이 닥치게 되면, 오롯이 세상에 남겨진,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부분 중, 가장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아마 가장 슬프고도 아픈 울음이 될 것 같다. 나의 네 번째 울음을 울기 전에, 단 한 달 만이 라도, 편하게 모실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나의 네 번째 울음은 사회적으로 강요되지 않은 나의 진솔한 울음이 되었으면 한다. 남들에게 보여야하는 ‘강요된 효’때문에 울고 싶진 않다. 아니, 어쩜, 전혀 울지 못 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쩜, 안 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때 가봐야 알 일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나를 위한 울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남겨진 한 가지 꿈은, 어쩌면 또 하나의 다른 울음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적당히 마시고 취한 후, 사랑하는 여인과 BLUES를 추며, 소리 없이 마냥 울어보는 것이다. 얼마 전 읽은 글 중에, 혼자서 알프스 산 을 걷다가,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산 속에서, 웬 지 모르게 눈물이 나, 하염없이 마냥 울었다는 사람처럼,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한 설움들을 내보내고 싶을 뿐이다. 그 꿈을 위해, 나의 바람을 위해, 지금은 울음을 진정 아껴 두어야 하겠다. 언젠가 이 작은 꿈이 이뤄지길 바라며, 남은 나의 생에서 진정으로 사랑 할 수 있는 여인을 만난다면, 아주 아름다운 황혼에 서서 지는 노을을 아름답다 할 텐데...

백수길

부산 출생
파주에서 성장
워싱턴 주 Eastern Washington University 졸업
저서: 시집 <섞인 사람들>
계간지 <불교문예> 2009년 여름호 수필 ‘까지밥’ 발표
달라스한인 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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