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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공부하는 아이]주번의 추억

김윤회/공부습관 예스클래스 러닝센터 원장

수업 시간만 되면 칠판에 필기를 잔뜩 하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도 마찬가지로 빽빽하게 필기를 한 다음 아이들에게 적으라고 하는데, 한 학생이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습니다. “거기 자고 있는 놈 누구야?” “얘 주번인데요” “주번이 왜 자고 있어. 빨리 깨워” 옆자리에 있던 친구가 주번을 잡아 흔들며 깨웠습니다. “야 주번, 선생님이 빨리 일어나래”

눈을 번쩍 뜬 주번의 눈에는 빽빽한 칠판과 화난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이 아이는 정신없이 앞으로 뛰어나가서는 칠판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답니다. 그게 주번의 할 일이니까요. 이 불쌍한 주번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인에게 들은 학창시절 추억 중 한 대목입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봐도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노릇이 주번입니다. 일 년에 두세 번씩 차례가 돌아왔는데, 노예도 이런 상노예가 없습니다. 일주일 내내 다른 아이보다 일찍 등교해서 교실과 복도를 청소했고요. 칠판 지우고, 지우개 털고, 주전자에 물 떠놓고, 컵 닦아 놓고, 우유 급식받아오고, 체육 시간에 다른 애들 축구하고 있을 때 빈 교실 지키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교실을 정리하고 가야 했지요. 그뿐인가요? 선생님들마다 말씀하시죠.‘주번 나와서 이 문제 풀어봐’ 혹 교실에서 물건 없어지면 주번이 누명 쓰기 일쑤였고요. 주번 차례가 돌아온 그 주는 참으로 심신이 피곤했습니다.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제가 담임했던 학급에는 주번이 없었습니다. 주번이 도맡아 했던 모든 잔일은 학급 친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아침마다 복도를 청소했고, 어떤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칠판을 지웠으며, 또 다른 친구가 지우개를 털었습니다.



물 떠오는 친구, 컵닦는 친구, 교실 앞면 청소하는 친구, 뒷면 청소하는 친구가 모두 따로 있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학기 초에 아이들 스스로 정하도록 합니다. 할 일 목록을 칠판에 다 적은 후 아이들은 스스로 원하는 일을 선택합니다.

만약 서로 겹치면 가위 바위 보로 결정했고요. 예외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별것 아니라고 여길 수 있는 이런 역할 분담은 아이들에게 중요한 의미로 작용합니다. 아이들은 일 년에 몇 번씩 지겨운 주번 역할을 때우고 넘어가는 대신 학급이라는 조직에서 자기만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 역할을 통해서 스스로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겁니다.

내 일이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이 일을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조직 안에 무엇인가에 기여하고 있고 친구들이 나를 필요로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자각이 바로 존재감입니다. 존재감은 자존감으로 발전합니다. 자기가 소중한 사람이고 스스로 무슨 일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수업 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수업은 주로 팀별 학습이었습니다. 평소에 학습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친구들이 팀장이 되어 팀원을 구성하도록 했습니다. 순서를 정해 자기 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친구들을 하나씩 데리고 오는 겁니다. 처음 한 명을 뽑았을 때부터 이미 그들은 하나의 팀이 되어 나머지 팀원을 누굴 데리고 올 것인지를 심각하게 협의합니다. 이렇게 구성하니까 팀간의 실력 편차는 별로 없었고, 수업은 공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퀴즈나 활동으로 진행되는 수업에서 팀이 된 친구들은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여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가장 잘한 팀에게는 가산점 등의 보상이 주어지지요. 개인의 효과적인 역할이 주어지기 때문에 수업에 대한 참여도나 집중도는 당연히 높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업은 재미있습니다.

조직의 구성원이 어떤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아이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가정내의 역할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의 모든 일은 엄마와 아빠만의 몫이지요. 하지만 오냐오냐 떠받들며 자라거나, 방치되면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바르게 알지 못합니다.

이 아이들은 교만함이나 헛된 자존심, 상실감과 열등감 등은 가질 수 있겠지만 건강한 자존감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자기의 가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의:703-314-2899, yesclassv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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