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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틈과 땜

어릴 적 내 고향 시골 마을에는 납땜 장수가 자주 왔다. 집 전화기도 드문 때라 이장이 확성기로 그의 출현을 알렸다. 구멍 난 양은 냄비, 손잡이가 떨어진 주전자, 조각난 솥뚜껑 등을 든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였다. 세차게 뿜어 나오는 시퍼런 불꽃이 양은 조각을 녹여 틈을 메우는 과정이 신기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땜 도사였다. 내 바지 무릎에 구멍이 나면 잔잔한 꽃무늬 천을 동그랗게 공글러 붙였다. 양말은 전구에 신겨 구멍 난 곳에 천을 덧대어 기웠다. 너덜거리는 책보는 마름모꼴로 자른 오방색 포플린 천을 여기저기 붙여서 멋진 패턴을 만들었다. 떨어진 단추는 튼튼한 명주실로 단숨에 꿰매주셨다.

오늘 뇌척수 틈을 메우는 시술이 있었다. 마취과 닥터 누엔을 돕는 팀에 합류하여 응급실에 갔다. 젊은 여성이 극심한 두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닥터 누엔은 국부 마취와 똑같은 시술 종료 단계에서 마취제 대신 혈액을 환자의 등뼈에 주입했다. 환자의 팔목에서 채취한 15㎖의 혈액. 일명 에피듀럴 혈액 패치. 누수를 막는 땜 작업.

에피듀랄 국부 마취 부작용 중의 하나는 주사액을 전달하는 튜브 끝이 얇은 뇌척수 경막을 뚫는 것이다. 이 미세한 틈으로 뇌수가 새어 나오면 뇌압이 낮아져서 환자는 아무리 강한 진통제로도 진정되지 않는 두통을 앓게 된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환자 자신의 혈액으로 뚫린 구멍을 봉합하는 것. 점성이 강한 피의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주입된 혈액이 뇌수가 흘러나오는 틈에 다다르면 그곳을 채우면서 응고된다. 나머지 혈액은 서서히 몸속으로 흡수된다. 시술을 받은 환자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수 시간이 경과하면 두통이 말끔히 사라진다.

틈은 작을 때 막아야 한다. 너무 벌어지면 회복이 어렵다. 작은 틈 하나 때문에 거대한 댐이 무너지기도 한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견고하다 믿었던 오랜 신뢰와 우정이 이기심 때문에 순식간에 어그러진다.

우리 모두에게는 틈이 있다. 그 틈으로 거침없이 몰아쳐 들어온 세상 찬바람이 사람을 간단없이 주저앉게 한다. 비수처럼 날아온 한마디의 말이 의식의 밑바닥까지 휘청거리게 한다. 너나 나나 허무한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 건데,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자.

틈과 땜의 언어 역학을 보라. 'ㄷ'이 나뉘면 틈이 된다. 'ㄷ' 두 개가 뭉치면 땜이 된다. 땜. 나뉘고 떨어진 것을 이어주고 붙여주는 것. 상대의 허물과 단점을 덮어주는 것. 세상에서 얻은 상처를 말없이 어루만져 주는 것.

나의 바지가, 양말이, 책보가 온전한 구실을 하고 단추가 제 자리를 지킴으로 나의 자세가 단정해진다. 내가 너의 틈에, 네가 나의 틈에 땜이 되어줄 때 우리 각자의 삶이 온전해진다. 나의 작은 배려가 상대방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 나의 틈이 너에게 땜이 되도록 마음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

세상은 땜의 원리로 이름답게 유지된다.


하정아 / 수필가·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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