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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산책] 발 足

김은자 / 시인
김은자 / 시인 

[뉴욕 중앙일보] 발행 2019/03/26 미주판 12면 기사입력 2019/03/25 16:13

노을이 물든 저녁, 하늘을 올려 본다. 신발 속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일상 속에서 딱딱하게 죽었던 세포들이 기지개를 켜듯. 발은 육체 중 가장 먼저 울음을 감지하는 지체인지도 모른다. 나를 자주 고독 앞에 세워 놓기 때문이다. 삶은 달릴수록 고독하지 않은가? 달리는 일을 발이 감당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발은 외로움의 대명사다. 평생 주인을 위해 걷고 달렸지만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존재 아니 비존재, 몸이 발 위에 군림해도 발은 그런 주인을 말없이 부축해야 했다. 살다 보면 발이 바위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무거운 발을 끌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겨울 바다를 찾는다. 모래밭에 앉아 발을 모색한다. 지친 발을 만지면서 '발이 나를 바다 앞에 세워 놓았구나' 그제서야 발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때도 지금도 발은 아무 말이 없다. 지친 것이 분명한데도 침묵한다. 겨울 바다에서 수평선이 어둠과 일직선이 될 때까지 모처럼 발이 멈춘 날, 나는 그토록 고요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파도가 어둠에 묻힐수록 비명처럼 들리듯 발에게도 흐느낌이 있는 것을 알았다.

세상 모든 전율은 발끝부터 시작된다. 나는 감동이나 떨림이 느껴질 때면 습관처럼 발가락을 오므리는 버릇이 있다. 발바닥은 세월이 전복되어 굳은 소리들인지도 모른다. 발가락은 굳어버린 소리를 뚫고 달려있는 흔적들이다. 다섯 발가락에 힘을 주면 아무리 힘든 세상도 건너가곤 했다. 굳은살처럼 딱딱한 것들이 만져지는데도 걸었다. 나는 세상 모든 떨림을 발로 받아내며 살았다. 오, 신발 속, 표정을 지운 가여운 발은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왜 나는 발로 사는 것 같은 기분이 종종 드는 것일까? 발은 바보다. 쑥맥, 사랑은커녕 몽정 한번 못해본 말 그대로 숫, 고독을 가지고 노는 발가락들은 삶의 오르가즘이었는지도 모른다. 발등에 귀를 대고 들어보면 상처가 들린다. 뽁뽁- 물방울이 터지듯 발이 숙성하는 소리도 알 수 있다. 외로움은 발을 지나야 그제야 발효하기 시작한다. 아주 가끔 발이 꿈을 꾸기도 하는데 공갈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소리도 들린다. 다시 일어나자고 한다. 자꾸 걷자고 한다. 상처가 아픈데도 달리자고 한다.

나에게 발은 바다다. 아니 축구공이다. 세상을 향해, 세월을 향해 힘껏 공을 찰 수 있는. 발에는 본시 표정이 있었던 걸까? 걷기 시작하면서 표정이 지워졌는지도 모른다. 표정을 지우지 않으면 어찌 험한 세상을 건널 수 있었을까? 발끝에 매달려있는 새끼발가락을 보라. 보폭이 버거웠는지 눈을 질끈 감은 채 누워 있다. 애써 자는 척 하지만 안다. 깨어있다는 것을. 미안하다. 이 무거운 몸을 싣고 다니는 발아 정말, 미안하다.

바닥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발바닥은 뒤집힌 배처럼 물 위를 떠다니는 물고기인지도 모른다. 물살에 베이고 부딪치는 일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방황했는지 알 수 있다. 바닥이란 원래 딱딱한 것들의 표상이다. 견고하지 않고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표정을 지우지 않고는 지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발의 표정을 읽은 것은 아버지가 떠나고 난 후였다. 그때까지 아버지 발의 표정은 식솔들의 그늘에 드리워 한없이 흐렸다. 이상한 것은 아버지 발의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발에 올망졸망 매달린 발가락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생전 서커스처럼 자식들을 매달고 씩씩하게 걸으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자식들이 무거울수록 세상의 외줄을 마술처럼 걸으셨다. 아버지의 발은 왜 그리 말주변이 없었던 것일까? 아버지 발은 늘 상처투성이였다. 외벽도 그런 외벽이 없었다.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풀잎에 베어 피도 흘렸지만 아버지의 발은 눈 먼 장님이었다.

아버지의 발이 나의 발을 일으킨다. 일어나보니 성큼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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