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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아흔 살 할머니의 자서전 쓰기

오렌지 글사랑 단톡방에 강금순 할머니가 사진 한 장을 올렸습니다. 빨갛게 익은 감이 화면 가득한 감나무 사진입니다. "감 개수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란 글이 달려있습니다. 할머니는 올해 아흔 살입니다. 벌써 몇 년 째, 한 달에 두 번 있는 수업시간에 결석 한 번 하지 않는 분입니다.

감나무 사진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렇습니다. 꽃나무는 꽃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과일나무는 과일의 이름으로 불리어집니다. 감이 열리면 감나무이고, 석류가 달리면 석류나무입니다. 장미꽃을 피우면 장미나무, 매화가 맺히면 매화나무가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분의 아들이나 딸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아버지 또는 누구의 어머니가 됩니다. 아들이나 딸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위해 부모는 평생을 바칩니다. 결국, 열매의 이름표를 단 나무로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를 '찬열이 아부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도 같은 이름으로 불러줍니다. 열매와 나무 사이의 숙명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 아버지는 '찬열이 아버지'라는 호칭 외에도 '선생님'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만드신 열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열매를 만들어 낼 권리가 있습니다. 선생님, 작가, 화가, 사업가 등 수많은 과일이 있습니다. 그 과일이 익으면 이름과 함께 불리어지게 됩니다.

강금순 할머니는 3년 전 수필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여든일곱 살에 얻은 열매입니다. 지금은 자서전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함흥에서 월남하여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는 웬만한 소설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합니다.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면서 진정한 부자는 재산이 많은 이가 아니라 추억이 많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몸에 박힌 한때의 기억으로 한 평생 살 수 있는 힘을 얻는 게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할머니의 자서전이 마무리되는 날 그 열매를 따라 할머니는 작가 강금순 여사로 다시 기억되리라 믿습니다.

하찮게 보이는 사진 한 장, 누군가 흘린 한 마디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을 지탱해주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강금순 할머니의 글을 보면서 그것을 실감합니다.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빛나는 시절은 자신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이 그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누구도 그것들을 시비할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 사무실에는 상패 몇 개가 걸려있습니다. 그것들은 내가 걸어온 길에서 만났던 소중한 풍경입니다. 그들은 말없이 나를 응원하고 일깨워줍니다. 힘의 원천입니다. 책에서 읽은 한 줄의 글, 어떤 자리에서 얻어들은 한 마디 말, 이런 것들이 죽비가 되어 나를 후려치기도 합니다.

감나무 사진을 다시 꺼내봅니다. 할머니가 남긴 글을 보면 빙긋이 웃음이 나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저에게 보낸 편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런 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정찬열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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