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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칼럼] '완장'을 찬 사람들

임종술(조형기 분). 저수지 양식장 관리이다. 그의 팔뚝엔 '노란 완장'이 채어져 있다. 완장에는 '감독'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시골 출신으로 도회지를 떠돌며 안 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임종술은 완장 찬 사람들에 쫓겼다. 아파트나 상가 경비원이나 방법대원의 위엄은 대단했다. 그럴 때마다 임종술이 눈여겨 봐둔 것이 있다. 완장이다.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그토록 대단한 힘을 갖는 것은 오로지 '그 놈의 완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도회지 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해, 별 볼일 없는 백수로 지내던 임종술에게도 어느 날 완장 찰 일이 생겼다. 저수지 양식장 감시인. 저수지 사용권을 따낸 벼락부자 최 시장이 노란 완장을 채워준다는 말에 솔깃했다. 완장만 차면 자신도 저수지 주변에서만큼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소설가 윤흥길의 장편소설(완장)로 1983년 발표됐고, 1989년에 8부작 TV드라마로도 방영돼 화제가 된 내용이다. 뜬금없이 완장이 떠오른 것은 유나이티드항공 오버부킹 사태 후로도 계속된 항공사들의 고압적 고객 서비스 장면을 유튜브를 통해 보면서였다. 정확히 완장은 아니었지만 항공사나 혹은 항공국 관계자로 보이는 조끼 입은 사람들의 태도는 당당했다. 두 손을 허리춤에 대고, 승객에게 좌석 이동을 강요하는 폼은 그야말로 완장 찬 임종술, 그대로였다.

코믹연기의 달인 조형기가 출연한만큼 드라마 분위기는 가벼웠지만 작가가 터치한 주제는 1970-80년 대 한국의 피폐한 사회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법 집행이 엄정한 법의 위엄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사유화한 정치권력과 금권력에서 비롯하는 어지러운 현실. 그런 현실과 타협해 작은 완장이라도 얻어 차야만 살아갈 수 있는 부도덕한 현상. 돈도 빽도 없는 서민들은 자신들의 앞에 늘어 선 '크고 작은 임종술'에 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30년이나 지난 그 시절의 임종술이 점점 더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얼핏 동영상 속 조끼가 완장으로 오버랩되긴 했지만 한 번 떠오른 기억은 다양한 권력의 얼굴들로 빠르게 대체됐다. 임종술의 얼굴은 최순실, 정유라, 김기춘이 됐다가 트럼프도 되고, 김정은으로도 바뀌었다. 가까이는 학창시절 등교길 교문 앞에 버티고 있던 '흰색 완장' 찬 선도부와 고압적이던 DMV 직원의 모습까지.

일개 벼락부자 최 사장이 부여한 완장만으로도 저수지를 넘어 동네 전체로 권력의 범위를 넓혀 간 임종술. 누구든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거나 오염시키는 행위를 하면 임종술에게 치도곤을 당했다.

완장의 폭력은 복제력이 강했고 교활했다. 최 사장이 준 완장에 저수지 '공유수면관리법'이라는 법을 도입하면서 임종술의 힘은 경찰도 때려 눕히고 심지어 최 사장도 넘어선다. 두 줄간 완장이 그 정도였으니 세 줄, 네 줄, 그 이상이라면 어떨까. 심지어, 국민으로부터 '진짜 완장'을 부여받았거나 그 패거리라면.

최근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트럼프가 다른 나라 정상의 어깨를 밀치며 가운데 자리로 나서서 대접받으려고 한 장면이나, 권력남용으로 법원에 출두해 기자들에 레이저 눈빛을 쏘던 우병우, 청문회 자리에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당당했던 김기춘 등등. 모두가 또 다른 임종술이 아니던가.

눈에 보이는 완장을 차고, 저수지를 누빈 임종술의 오만이 차라리 귀여운 해프닝으로 비친 것은 그래도 임종술은 완장이 주는 권력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짝사랑하던 여인, 부월이와 야반도주라도 한 탓이다. 아직도, 알량한 완장을 얻어차려고 발버둥치고, 거들먹 거리는 임종술이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가.


김문호 / 경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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