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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채소에 사랑이 주렁주렁

사용 않던 비탈진 경계 일궈 텃밭으로 만들어
쑥갓, 파프리카로 보리냉면, 캘리포니아 김밥

하이디씨의 부부 텃밭 이야기

알프스의 하이디가 생각났다.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어린 시절 동화 속의 하이디. 그래서 더 궁금했다. 어떤 낭만적인 상상력으로 하이디란 이름을 가졌을까. 집 현관으로 들어가는 앞마당엔 예쁜 화초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돼지 인형들과 버섯들이 앙증맞게 놓여 있어 주인의 취향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뒷마당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으면서도 구석구석 재미있는 스토리가 가득했다. 마당을 빙 둘러가며 레몬, 금귤, 자몽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제철을 기다리는 대추, 자두, 감, 포도나무가 파릇하게 잎을 뻗고 있었다. 원래 텃밭은 가꾸지 않았는데, 마당 끝 편에 자리한 비스듬한 등성이를 일궈 작년부터 텃밭 작물을 거두었다. 영양분으로는 닭똥비료를 사용하니 어려움 없이 쑥쑥 잘 컸다고 한다. 토마토, 딸기, 깻잎, 상추, 파프리카, 할라피뇨, 오이, 호박, 쑥갓, 고추, 가지, 더덕, 당근, 옥수수까지 잘 자라 텃밭이 또 하나의 부엌이 되었다. 작년엔 처음 심은 수박이 주렁주렁 열려 모양은 없었지만 달고 시원한 수박을 온 가족이 기쁨으로 수확했다.

대학 간 아이들이 돌아오는 날이면 뒷마당은 풍성한 식탁이 된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고추며 호박이며 쌈채소들을 따서 야외 테이블에 놓아두고 부부는 고기나 해산물을 손질해 즉석에서 요리를 만들어 온 가족이 즐긴다. 직접 그 자리에 없었어도 신선한 행복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하이디씨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텃밭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인생이 어디 늘 행복하기만 한가요… 어려운 일도 있었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잘 커 줘서 갈 길을 가고 나니 빈 둥지가 너무 허전했어요. 그래서 텃밭을 생각하고 일을 벌였죠. 다행히 남편이 직접 밭을 갈고 씨 뿌리는 일을 도맡아 해주어서 아주 흐뭇한 텃밭이 됐어요. 아이들이 없는 저녁 식탁이 이젠 외롭지 않아요.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오늘은 토마토가 얼마나 익었는지, 당근은 손가락 마디만큼 자랐다는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금방 시간이 가요. 마치 새 자식을 키우는 기분이에요."



봄이라 아직 열매들은 여물지 않았지만, 밭에서 갓 따낸 채소들로 점심 식탁이 가득 찼다. 햇살에 여무는 빛깔들이 너무 예뻐서 식욕이 절로 당겼다. 색색의 파프리카와 쑥갓, 민트, 양파, 양배추, 오이를 곱게 채를 썰어 큰 접시에 돌려 담고, 가운데 빠알갛게 무친 보리냉면. 침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고추장과 송송 썬 김치를 버무리고 고춧가루, 물엿, 깨, 참기름 등을 넣어 매콤달콤하게 무친 보리냉면은 먹기 직전에 채소들과 버무려 서빙한다. 자연이 낼 수 있는 온갖 빛깔들을 눈으로 먼저 담으며 아름다운 봄의 오찬이 시작 되었다.

따로 김밥 메뉴도 재미있다. 하이디씨가 이름 지은 일명 '캘리포니아 김밥'. 김밥에 들어갈 재료들을 다 손질해서 접시에 담아놓고 작게 자른 김에다 각자 좋아하는 속재료들을 넣어 싸먹는다. 단무지, 파프리카, 소시지, 어묵, 맛살 등을 굵게 채를 썰어 놓고, 볶은 소고기도 준비한다. 쑥갓이나 민트를 곁들이면 아주 향긋하다. 똑같은 김밥이 아니라 속 재료의 선택에 따라 여러 종류의 김밥을 맛볼 수 있고 단단하게 말지않아 식감도 부드럽다. 여기에 쌈 채소까지 듬뿍 싸서 말면 싱그러운 봄맛이 절로 난다. 경쾌한 수다를 나누며 격의 없이 김밥을 싸먹는 일이 의외로 즐겁다. 다 말아놓은 김밥 한 접시보다 보기좋게 재료들을 담아놓으면 더 풍성한 일품요리가 된다.

사실 하이디씨의 요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북 출신의 어머니께로부터 배운 평안도 음식. 세련되고 소녀 같은 하이디씨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향토적인 음식 취향이다. 녹두를 갈아 역시 텃밭에서 딴 채소들과 김치를 넣고 부치는 '녹두빈대떡'. 채반으로 하나가득 부쳐낸 빈대떡은 여느 시골 아낙네의 손맛이다. 콩도 직접 갈아 비지를 만들고 큰 솥으로 하나 끓여내는 '이북식 콩비지'.

하이디씨는 "모두 어머니에게서 배운 집안의 특식이라 대를 물려 만들어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거실 한 켠 엔 어머니께서 쓰시던 옛 가구들을 한국에서 실어와 쓸고 닦고 곱게 두니 비싼 가구보다 은은하고 멋스럽다.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타국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딸의 얼굴에 가득히 배어났다. 배척하기보다 마음에 가득 품은 고국의 향기가 오히려 당당해 보여서 참 좋았다.

손바닥만할 때 들여온 거북이가 바둑판만한 등껍질로 마당을 한가로이 거닐고, 나무 그늘 아래엔 야옹이가 낮잠을 즐기고, 어디선가 복고풍의 선율이 흘러나오니 함께 나누는 꽃차가 마냥 향기로웠다. 귀찮다 말고 시작해 보리라. 작은들 어떠하리, 부족한들 어떠하리… 작은 텃밭과 테이블 하나, 조촐한 식사 한 끼라도 낭만이 가슴에 스며들며 그걸로 족하지 아니한가.


글.사진 = 이은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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