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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장진호 전투는 기적이었다”

70년 전인 1950년 겨울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이 치른 격전의 하나였다.
혹한의 날씨 속에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의 포위를 돌파하기 위해 미군 1해병사단 및 육군 7사단의 3개 대대 등 1만 8000여 명은 백병전을 벌였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미군 사상자가 1만 2000여 명이나 발생했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1일까지 17일 간 장진호 일대에서 치러진 이 전투와 관련해 미군 최고의 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17개가 수여됐다. 중공군 사상자도 4만 5000명 이상이었다.

이 전투 참전용사의 아들인 던포드 전 합참의장(사진)은 본지와 지난 인터뷰에서 “내가 해병인 이유는 장진호 전투에서 싸운 해병들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가장 엄혹한 지형과 가장 혹독한 날씨 속에서 싸웠다”라며 “해병으로서의 내가 성공했다면 그건 이들의 거대한 발자취를 따르려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중공군 79사단의 3개 연대가 미군을 전멸시키려 나섰던 그날 밤 백병전으로 싸웠다”고 말했다. 그날 밤은 던포드 전 합참의장의 부친이 20세 생일을 맞았던 1950년 11월 27일이었다.

던포드 전 합참의장은 성인이 될 때까지 부친으로부터 그날의 회고를 듣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는 자신과 해병들이 바다 쪽으로 진군하면서 겪었던 백병전의 공포와 동상을 결코 말하지 않으셨다”며 “내가 해병이 된 지 7년이 지나서야 아버지와 한국전쟁에 대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눴다”고 알렸다.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인 리처드 캐리 예비역 중장은 “이 전투는 엄청난 숫자의 중공군을 상대로 한 기적이었다”며 “전쟁 교본은 공격에서 승리하려면 3대1의 병력으로 싸워야 한다고 하지만 장진호 전투는 우리가 압도적으로 밀렸다.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던 한 지역에서 우리는 1개 소대로 중공군 2개 연대와 싸워야 했다”고 회고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돌파한 뒤 미군이 도달해 집결한 ‘바다 쪽’은 흥남이었다. 흥남 철수는 이렇게 시작됐다. 미군이 이곳에 몰린 피난민을 함정과 수송선에 태워 남으로 내려 보낸 세계 전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작전이었다.
장진호 전투를 통해 10만명의 피난민을 남으로 내려보내는 흥남 철수작전이 가능했다. 당시 미군의 에드워드 아먼드 사령관은 미군 함정에 실려 있던 무기와 물자를 버리고 대신 사람을 태웠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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