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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유공자 후손 인터뷰 "성실과 도전 정신 잊지 마세요"

5월 아태 문화 유산의 달 특집

김동국·박선민

김동국·박선민

2019년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친 3·1 운동과 한국의 임시정부가 들어선 지 100년이 된 해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 3월과 4월 남가주를 비롯해 시애틀, 애틀랜타, 뉴욕 등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면서 한인사회는 100년이 넘은 이민사 속에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에 5월 연방정부가 지정한 '아태 문화 유산의 달'을 맞아 남가주에 거주하는 한인 독립유공자들의 자손들을 만나 이들이 남기고 싶은 문화유산에 대해 들었다. 이들이 주류사회 속으로 향하는 2~3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성실과 도전'이었다.

송헌주 박사 외손자 김동국씨
모범 시민의 삶 추구하라


"영리하고 근면성실한 민족성을 잊지 말고 지냈으면 합니다.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후손들은 어느 곳에서 살아도 성공할 것입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송헌주(1880~1965) 박사의 외손자인 김동국(85·사진)씨는 특히 "어디서든지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할 것"을 강조했다.



송 박사는 1910년대 로녹대학과 프린스턴대학을 마친, 당시 보기 드문 유학생이자 지식인이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의 통역을 맡아 활동했으며, 1920년 전후 구미위원부 위원으로도 일했다. 1930년대에는 재미한인의 통합을 위해, 후반대에는 LA에 지은 국민회관의 건축위원장과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한인사회의 리더였다.

김씨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노력을 강조하던 분이셨다. 25살 때 워싱턴 대학에 유학하기 직전 LA를 방문해 처음 만났다는 김씨는 "3개월 동안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LA 한인사회를 이곳저곳 둘러본 기억이 난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국민회관을 구입하게 된 건 당시 한인들이 알게 모르게 당하던 인종차별을 더 이상 겪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이라 했다"며 "국민회관을 구입한 후 한인들이 마음놓고 한식을 나누고 회의하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고 기뻐하셨다"고 들려주기도 했다.

김씨는 졸업후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 한인으로는 처음 안경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한 사업가다. 그가 1967년 설립한 회사 'CSC Labs'는 안경 프레임과 렌즈를 생산해 납품하는 회사로, 한국인 특유의 근면과 성실함, 노력으로 김씨는 수년 만에 미 50개주와 중남미, 동남아 지역까지 공급하는 회사로 키워냈다. 2000년대 발행한 '비전먼데이' 매거진에 따르면 김씨의 회사는 당시 미국내 개인 안경렌즈 제조업체 중 전국 2위로 꼽혔다.

37년간 운영했던 사업체를 프랑스 업체에 넘기고 5년 전 은퇴한 김씨는 팔순의 나이에도 한국의 독립사와 미주한인 이민사를 알리기 위해 미 전국을 다니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는 늘 어디에서든지 본분에 충실하고 모범적인 시민이 될 것을 당부했다. 또 나라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후회하지 않는 삶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박용희 선생 증손녀 박선미씨
원하는 길 찾아 도전하길


LA한인타운에서 안과 전문의로 잘 알려진 박선민씨의 증조 할아버지는 3·1 만세운동 당시 중앙에서 기독교 대표의 한사람으로 활약한 박용희 선생(1884~1959)이다. 박씨는 상해로 망명, 임정에도 가담했으며 만주에서 체류하다 귀국후 교직자로 봉직하면서 일본 천신 부인, 신사참배 반대 등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하여 투쟁하다 옥고(3년)를 치르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LA로 유학 온 박씨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시력이 손상된 할머니를 보면서 안과 의사의 길을 택했다고.

미국에 사는 독립 유공자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깊이 생각할 시간도 없이 공부하고 일하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그 뿌리는 내 속에 자연스럽게 남아있는 것 같다"는 박씨는 "한인이라는 정체성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쌍둥이 두 아들에게 억지로 정체성을 심어주려하기보다 어릴 때부터 한국어를 배우도록 한글학교에 보내 자연스럽게 뿌리가 자랄 수 있게 노력했다"고 말했다.

또 대학생이 된 후 자녀들이 여름방학 등을 이용해 한국과 중국에서 머물며 한국과 아시안 문화와 언어를 배우도록 했다고 박씨는 덧붙였다. 코넬대에 동시에 합격한 마크 주니어(27)는 코넬대를 졸업한 후 법학대학원(JD)과 경영대학(MBA) 과정을 동시에 공부하고 있다. 내년이 졸업 예정이다. 또 다른 아들(더글러스)도 법대를 졸업했다.

박씨는 "공부 역시 강요하기 보다 스스로 좋아하는 걸 찾더니 스스로 열심히 했다"며 한인 부모들에게 "자녀가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고 조언했다.

또 2세와 3세들에게 박씨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기에 공부가 힘들었다. 간신히 의대시험도 보고 의사면허시험도 패스했다. 나 같은 1세도 노력하면 된다. 하물며 2~3세들은 더 많은 기회가 있다. 무엇을 하고 깨닫고 그 일에 도전한다면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장연화 기자 chang.nicol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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