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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색] 한국영화의‘포스트 봉준호’

2000년대초 충무로
르네상스 일궜던 자산인

장르 관행 파괴 창의력
현재에도 여전히 절실

1990년대 초에 한국영화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15%대에 머물렀다. 한국영화는 문화계의 천덕꾸러기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한국영화는 대중문화의 중심에 섰다. 2000년을 기점으로 국내 시장 점유율은 50%대 이상으로 올라섰고 최고의 예술영화만 가는 곳이라는 ‘세속적 영예의 오아시스’ 칸국제영화제에 거의 매년 기대작들을 출품했다. 1999년부터 2004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는 놀라운 속도로 영화산업 강대국에 올라섰으며, 동시에 해방 이후 어떤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겪은 바 없는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시작은 종잣돈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에 발표되고 이듬해인 2000년에 실행된 ‘한국영화산업진흥 5개년 계획’에 따라 1700억원의 영화진흥기금이 조성됐다. 이 기금을 종잣돈 삼아 생겨난 수십 개의 투자조합은 한국영화 산업의 규모를 삽시간에 불렸다. 자본의 팽창에 발 빠르게 부응하기 위해 제작자들은 아직 매뉴얼도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작 경쟁에 매달렸다.

‘한국적 블록버스터’는, 할리우드 영화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제작비를 들였으면서도 할리우드 대작과 겨룰 수 있다고 하는 이 시기 한국영화계의 자기도취적인 야망을 함축한 용어였다. 강제규의 ‘쉬리’는 여의도 한복판이나 대관중이 운집한 축구장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스펙터클의 시연을 보여주며 한국영화의 흥행 신기록을 썼다. 너나 할 것 없이 대작에 매달리기 시작한 한국영화계는 곧잘 처참한 쓴맛을 봤다. 장선우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당시로선 기록적인 제작비인 100억을 썼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 흐름은 지속되었고 2004년 나란히 천만 관객 신기록을 쓴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로 절정에 달했다.

한국적 블록버스터의 모험적인 시도가 이어지는 사이 웰메이드 영화가 또 다른 충무로의 키워드가 되었다.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등이 이때 자신들의 전성기를 열었다. 소설가에서 전업한 이창동을 예외로 하면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영화 역사에 대한 지식을 자신들의 영화에 적용하기 시작한 첫 번째 세대의 감독들이었다. 이들의 성공사례는 다소 극적이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로 재기 충만하다는 평을 받았으나 흥행에 실패해 좌절했던 봉준호는 범인이 잡히지 않는 파격적인 스릴러 영화 ‘살인의 추억’을 성공시켜 감독 경력의 반전을 이뤄냈다.



박찬욱은 ‘살인의 추억’이 나온 그해 하반기에 ‘올드 보이’를 개봉시켰는데 이 영화의 성공은 ‘살인의 추억’보다 더 극적이었다. 1990년대에 두 편의 영화로 흥행 실패를 겪은 후 감독보다는 비평가로 더 유명해질 뻔한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로 흥행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 기세를 몰아 ‘복수는 나의 것’을 연출했지만 이 잔혹한 하드보일드 스릴러는 만개한 연출자로서의 재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게 망했다. ‘올드 보이’는 개봉 전에 박찬욱의 영화광으로서의 취향이 극단으로 펼쳐진 작품이라 결국 박찬욱 경력의 레퀴엠이 될 거라는 냉소적인 예측이 대세였다. 하지만 흥행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기개봉 작이었는데도 이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에 초청돼 그랑프리를 받았다.

김지운은 ‘반칙왕’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등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자기 스타일의 넓은 폭을 증명하는 한편 골수 영화 마니아와 대중의 주목을 동시에 받았다. 가장 특이한 케이스는 류승완인데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독립영화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 등의 상업영화를 만들면서도 제대로 크게 흥행한 적이 없었으나 평단의 호평만으로도 계속 경력을 이어갔다.

블록버스터 대작과 웰메이드 영화들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한국영화계는 규모의 경제에 매달렸다. 시네마 서비스, 사이더스, 명필름 등은 코스닥 우회상장을 통한 몸집 불리기에 열중했지만 자본은 급속이 말라갔다. 소수 천만 영화의 화려함 뒤에는 다수 쪽박 영화의 그늘이 있었다. 대박 영화가 다수의 중박 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잡아먹는 아이러니가 2000년대 중반 영화산업의 딜레마가 되었다. 충무로의 대형 영화사가 되길 꿈꿨던 시네마 서비스, 사이더스, 명필름 등은 2006년을 고비로 차례로 대기업에 자기들의 지분을 팔았다. 2000년대 초반 영화사들의 물주 취급을 받았던 대기업 투자 배급사들은 더 강화된 매뉴얼로 영화사들을 옥죄었다. 할리우드식 제작 마케팅 매뉴얼이 한국영화계의 보편적 관행으로 자리 잡았고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등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거듭날 수 있었던 창작 환경은 한때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전설로 남았다.

2000년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의 가능성은 할리우드식 장르 영화의 관행을 따르지 않고 한국적인 발상으로 장르 관행을 부순 젊은 감독들의 창의력에 있었다. 아파트 지하실, 논두렁 배수구, 한강 교각 아래의 익숙한 풍경 속에 극적인 사건들을 배치한 봉준호의 성공은 이 사례의 모범이었다. 로컬한 것으로 글로벌한 것에 맞선다는 배짱은 이 시대의 자식인 봉준호 세대의 영광에만 희미하게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김영진 /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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