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뜨락에서] 첫사랑

학교에서 딱딱한 강의를 듣다가 지루했던지 강의를 시작하려 하니까 엉뚱한 발언을 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의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세요" 하니까 온 교실 학생들이 "네, 교수님. 교수님"하고 교실이 소란해 졌습니다. 나는 좀 주춤했지만 나의 이야기를 멋지게 채색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머뭇거리다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뚜르게네프도 아니고 베르테르도 아닌데 어떻게 첫사랑의 이야기를 하라는 겁니까. 첫사랑은 무덤까지 비밀로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첫사랑이 이렇고 저렇고 아내에게 고백하면 이 첫사랑의 쇠사슬은 일생 동안 여러분의 목을 매고 부부 싸움을 할 때마다 여러분의 목을 조이겠지요. 첫날밤 첫사랑의 고백을 했다가 사랑하는 남편과 헤어지고 끝내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테스의 비극을 모르십니까. 황혼이 지는 저녁에 베란다에서 커피를 한 잔 들고 책을 보는 척 하면서 오래 전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주름진 눈꺼풀에 질척하게 눈물이 고이는 남자를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이런 첫사랑이 없이 결혼하고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첫사랑의 병을 앓은 사람의 눈동자에는 바이칼 호수와 같은 깊은 신비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겠지요. 이런 첫사랑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진주를 품은 조개와 같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이런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의 가슴을 다시 뒤집어 보려고 하지 마세요"라고 말을 끝내었습니다.

아마 일생을 살면서 첫 번의 사랑으로 결혼을 하고 사는 사람들 보다 첫사랑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훨씬 많겠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 잃어버린 사랑의 노래가 제일 많지 않습니까. 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것은 꿈 때문이겠지요. 이루어 질 수 없는 꿈. 알베르트의 부인이 된 롯테를 사랑하는 베르테르 같은 남자. 남자들을 데리고 노는 연상의 여인 지나이다를 사랑하는 브리디미르 뻬뜨로비치 같은 소년. 중고등학생 때 만나 전혀 준비가 안 된 청소년들의 사랑. 말 한마디 붙여 보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꿈만 꾸다가 남가일몽의 꿈이 된 행자승처럼….

얼마 전 나는 진 시몬즈를 사랑했습니다. 검은 소선화 성의 스파르타카스에 출연한 그녀를 보고 미칠 것 같았습니다. 나는 "하나님, 내가 그녀를 잊게 해주십시오. 아니면 그녀를 내게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했다고 고백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첫사랑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 중에는 남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내향적인 여자들이 많을 것 같지만 여자들에겐 망각의 병이 남자들보다 심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 날 남자는 첫사랑을 그리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에 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안톤 체홉의 귀여운 여인은 착하고 귀엽지만 연극인인 남편이 죽으면 몇 달 있다가 목재상과 결혼하고 또 목재상 남편이 죽으면 수의사와 사귀는데 그럴 때마다 남편을 진실로 사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봄페이우스 카이자르 안토니우스의 가슴을 전전하던 클레오파트라도 마지막 남자 안토니우스를 위해 울었습니다. 햄릿의 거투루드 왕비는 그렇게 훌륭하던 남편이 죽자 마자 그의 동생인 글러디어와 결혼을 합니다. 햄릿은 아버지의 장례식 음식이 상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입었던 그 옷을 입은 채 글러디어 왕과 결혼한 어머니를 원망하고 저주하지 않습니까.

오늘 어떤 모임에서 "선생님의 첫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어떤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아픈 상처를 다시 긁은 것처럼 가슴이 쓰라렸습니다. 장난으로 개울에 돌을 던지지 마세요. 당신은 장난이지만 돌에 맞은 개구리는 죽을런지도 모릅니다.


이용해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