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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사람들] “다양한 봉사활동…자유롭게 살고 싶어”

최상휘 영남향우회 이사장

1988년 7월 15일. 최상휘씨(사진•82) 가족 4명은 초청이민으로 시카고 오헤어공항에 도착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던 중 워싱톤주 시애틀에 살고 있던 처제로부터 동업을 제의 받고 10월 그곳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6개월만에 짐을 싸서 시카고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운타운 템플 제철회사에 취직을 했다. 임금이 시간당 18달러로 인기가 높았다. 당시 고참들의 월급이 4천 달러를 넘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인 직원은 50여 명으로 내로라 하는 이들이 꽤 포함되어 있었다고 회상한다.

자녀들이 중국집을 오픈해보겠다고 해 1997년 10월 뎀스터 길 난가든을 인수해 7년간 운영했다. 비즈니스를 하는 동안 갖은 사기 행각과 생각지도 못한 힘든 경험을 많이 겪었다고 들려주었다.

2006년 10월 12일은 그에게 특별한 날이다. 105리하고도 192m를 더 달려야 하는 마라톤을 처음 완주했기 때문이다. 부인 최성숙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담배를 끊고 달리기 클럽에 참가하게 된 후 첫 성과였다. “마라톤을 마치고 나니 세상을 반쯤은 얻은 듯한 환희와 기쁨이 넘쳤다”며 웃는다.



그는 한국에서 고학으로 동국대 법정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지방법원 사건계 서기를 지냈다. 1967년 4월 미국 포드사 협력업체 기술자로 3년 계약을 맺고 월남에서 밤낮 없이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집으로 1천 달러 이상을 송금했다. 진양건설에 근무하다 미8군 시설 공병대 보급서기직에 응모해 7년 뒤 보급을 총괄하는 자리까지 올라 팀스피리트 훈련 때 모든 시설물자를 관리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만나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뿌리치고 바르게 살자는 일념으로 살았다. 큰돈을 부정으로 벌게 되면 결국 일장춘몽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 동안 한인회장선거관리위원, 문화회관 자원봉사, 한인회 행정실장, 영남향우회 골프대회장 등을 맡으며 커뮤니티 일에 적극 참여했다. 주변의 요청을 받으면 박절하게 손을 떼지 못 하는 성격 탓이라는 그는 “이젠 조금은 자유의 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링컨우드에 거주하며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James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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