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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산책] 아버지와 남자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엄마를 바꾸어 달라고 했는지 남편이 내게 전화를 건넸다. "엄마, 남자는 나이가 들면 많이 쓸쓸해지는 것 같아요. 엄마가 각별히 신경 써 줘야겠어요. 아버지가 고집이 보통 강한 사람이 아닌데 많이 순해졌어요." 아들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서 떨리고 있었다. "너도 아버지를 닮아서 고집이 보통이 아닌데 많이 순해졌구나"라며 나는 깔깔깔 웃었다. 아들이 남편을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옛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는 남자와 아버지라는 남자가 대치하기 시작한 것은 아들의 사춘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은 육남매의 장남, 전통적인 한국 가장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아버지를 모시며 미국 생활을 했을 정도로 보수적인 집안의 맏아들이었다. 반면에 아들은 미국에서 낳고 자라 한국식 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반은 미국인과 다름없었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들은 아버지의 훈계를 잘 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들에게 남편은 영웅이었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작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들이 하이스쿨에 입학하면서부터였지 싶다. 운동도 못 하고 공부에만 시달리던 아들이 어느 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흔쾌히 허락을 했다. 그 주말 남편과 아들은 운동도구를 사기 위해 운동기구점에 갔다.

아들이 하고 싶어 한 라크로스란 운동은 스틱이라고 부르는 잠자리채 닮은 긴 망이 달린 스틱을 이용해서 공을 낚아채고 골대에 넣는 운동이었다. 막대기를 휘둘러서 공을 주고받아야 하므로 스틱과 헬멧은 필수였다. 운동용품은 생각보다 비쌌다. 막 시작한 운동이니만큼 남편은 적당한 가격의 스틱을 사주려 했지만 아들은 값비싼 스틱을 사고 싶어 했다. 그날 남편과 아들은 보기에는 번듯한 스틱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첫 전쟁이 터졌다. 값비싼 스틱을 사주지 못 한 남편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처음 시작하는 거니까…일단 저렴한 스틱으로 시작하고…그리고 네가 계속할지 하다가 그만둘지도 모르니 일단은 그렇게 시작하자"라며 아들의 눈치를 봤다. 제 맘에 드는 스틱을 구입하지 못 한 아들은 남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수저를 놓고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이 방 밖으로 나왔을 때 화가 난 남편은 라크로스 스틱을 부러뜨릴 것처럼 행동했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에게서 필사적으로 스틱을 빼앗았다.



남편은 이미 아들에게 힘으로 밀렸다. 하이스쿨 9학년인 아들은 이미 제 아버지보다 몇 뼘이나 키도 크고 근육도 단단해져 아이가 아니었다. 그날 남편은 아들과 첫 전쟁을 치른 후 아들을 한 남자로 인정했을 것이다. 둘의 전쟁은 아들이 하이스쿨 12학년 때가 되면서 최고조를 이루었다. 남편과 나는 아들의 성장통을 가슴 조리며 지켜 보았다. 아들은 우리가 꿈꾸던 아이비리그에 합격을 했고 한 남자로서 확실한 독립체로 성장해 갔다. 의대에 들어간 들어간 아들은 전문의가 되는데 있어서도 남편과 의견이 달랐다. 남편은 수술의가 되기를 원했고 철학과 인문에 관심이 깊었던 아들은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 둘은 자주 부딪치면서 서로 다른 색깔을 내곤 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기 보다 두 남자였다. 가끔은 두 남자가 하모니를 이루기도 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있던가? 남편이 져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남편의 색깔은 조금씩 엷어졌고 아들의 색깔은 승승장구 강해져 갔다. 푸릇푸릇한 색의 정점을 이루었을 때 아들은 결혼을 했고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를 염려한다. 어미인 나에게 아버지를 잘 봐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애들을 키워보니까 아버지를 알겠더라고요"라고 말할 때면 아들의 눈빛이 그윽해지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남편은 아들의 사춘기 시절이 떠오르는지 달무리처럼 깊어진다.

남편은 아들에게 다시 영웅이 되었다. 엄마에게 작은 일까지 의논하던 아들이 소소한 일이 생겨도 아버지를 찾는다. 남편이 아들의 보호의 대상으로 등극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한 남자로 이해하기까지이니 얼마큼 세월이 흘렀던가? 아들에게 아버지가 한 남자의 인생으로 보이니 말이다. 아버지가 크게 보이는 것을 보니 아들의 시력이 좋아졌다.


김은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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