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커뮤니티 포럼] 1965년 대한민국, 베트남전에 뛰어들다

베트남 전쟁 지상 강좌⑤

지금은 베트남의 전승기념관 같은 역할을 하는 구 월남의 대통령 관저 지하 작전 상황실에 걸린 외국 군대 규모 게시판.  한국군(Dai Han)은 1968년 6월 29일 현재 5만355명을 기록했다. [사진 이길주]

지금은 베트남의 전승기념관 같은 역할을 하는 구 월남의 대통령 관저 지하 작전 상황실에 걸린 외국 군대 규모 게시판. 한국군(Dai Han)은 1968년 6월 29일 현재 5만355명을 기록했다. [사진 이길주]

1965년 여름, 대한민국의 운명이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멀리, 나라 밖 전쟁에서 싸우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그 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해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과 정상 회담을 했다. 여기서 국군 전투병력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묵시적 합의가 이루어 졌고, 3개월 후인 8월 국회는 파병안을 통과시켰다. 두 달 뒤, 청룡부대 해병들이 남베트남에 상륙한다.

제2전선론과 신제국주의론

비전투 병력인 비둘기 부대의 파병이 이루어진 1964년부터 따지면 55년이 지났지만,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의미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뜨겁다. 논쟁의 스펙트럼 양극에는 제2전선론과 신제국주의론이 있다. 냉전 구도 안에서 베트남은 한반도의 연장선이란 주장이 제2전선론이다. 당연히 베트남 전쟁과 남북 대치 상황 사이에 직접적 연계성이 존재함으로 파병은 전략적으로 필요한 자주적 판단이란 시각이다.

반대 극에 종속론이 있다. 미국의 침략전쟁에 제일 만만한 한국의 전투병력을 끌어왔다는 주장이다. 도저히 'No'라 할 수 없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대한민국을 이용해 먼저 민족주의로 포장된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한다. 아울러 자원, 시장, 노동력이 풍부한 남베트남 및 동남아시아를 세계 자본주의의 체계 속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한다. 신제국주의의 이 같은 두 개 축을 떠받치기 위해 한국은 총 30만 병력을 보냈고, 이 중 5000명이 전사했으며, 1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주장이다.



역사는 요리와 다르지 않다. 채소와 육류 또는 생선이란 두 종류의 식자재가 있다. 이 둘은 성격이 극과 극이다. 하지만 이 둘이 합쳐질 때 요리가 만들어진다. 이 둘이 하나되게 하는 에너지가 열이다. 대한민국의 베트남전 참전도 두 개 다른 식자재가 요리되는 과정과 같다. 전후 세계는 둘로 갈라지고 공산권과 자본주의 체계의 양극 구도가 형성됐다. 중간지대, 소위 비동맹은 제대로 서 있을 곳이 못 됐다. 양극 헤게모니 세력의 마찰이 유발한 열기는 뜨거웠다. 대한민국은 이 열기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나라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뜨거운 지정학적 현실 속에서 박정희는 참전이란 요리를 만들어 냈다. 그 안에 채소(자주성)도 있고 고기(종속성)도 있다.

존슨이 원한 '동양의 사내들'

1965년 5월, 한국군 전투 부대를 파병하라는 존슨의 요구 앞에 선 박정희는 미국의 막무가내식 요구에 무릎을 꿇은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슬기로운 선택을 한 것인가? 박-존슨 회담을 통해 그 답을 구해 본다.

급하기는 존슨과 박정희 둘 다 마찬가지였다. 존슨은 베트남에서 연합군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 실망이 적지 않았다. 미국은 1954년 NATO(북유럽조약기구)를 본떠 SEATO(동남아시아 조약기구)를 만들었다. 20세기 들어 세 번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높은 가치를 상징 또는 주장하는 연합세력을 형성해 전선으로 달려갔다. 공유하는 가치에 기초한 연대체계는 전의에 선(善)을 더한다. 싸움을 선과 악의 대결로 구분하면 희생이 정의롭게 포장되고 그 가치가 고귀해진다. 그 어떤 전쟁, 어떤 편에도 꼭 군목이 따라나서는 이유이다. 미국은 이 살상의 현장에 대한 이상적 가치 부여 역사가 깊다. '개척자'란 자기 정체성을 1600년대부터 형성한 미국인들은 엄정하게 따져 주거공간과 생산자원을 위한 싸움에도 '성전(聖戰)"의 채색을 한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 원주민들 제거를 위한 싸움마저도 창조주가 목적한 바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1964년 말, 베트남 전쟁을 성전화 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실패했다. SEATO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공통의 이상으로 하나 되었던 최대 파트너 영국은 베트남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쳤다. 스코틀랜드의 전통적 취주 악기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군악대 한 팀도 베트남에는 보내지 않겠다는 영국이었다. 프랑스는 아예 베트남의 중립화 카드를 들고나왔다. 1965년 3월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다낭에 미국 해병대가 상륙했을 당시 미국과 존슨은 외로웠다. 역사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했던 존슨은 누가 보아도 확연한 자신의 'unilateral military action(일방주의적 군사 행동)'을 전통적인 'multilateral security measure(다국적 안보 정책)'으로 격상시켜야 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존슨은 지론이 있었다. "아시아의 남아들이 할 일을 미국의 사내들이 대신 해주기 위해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9000, 1만 마일 떨어진 곳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We are not about to send American boys 9 or 10 thousand miles away from home to do what Asian boys ought to be doing for themselves)." 1965년 여름, 존슨은 그의 지론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의 선언이 완전한 거짓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 '동양의 사내들'이 필요했다. 그는 대한민국에 60만 건아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

파병으로 더 많은 원조를

한국 전투부대의 참전은 존슨에게 매력적이었다. 북의 위협을 받는 한국이 참전하면 전선에서의 실제적 기여도 크겠지만 상징성도 높았다. 존슨은 한국의 참전을 세일즈맨의 상품 안내서처럼 들고 아시아 태평양의 다른 나라에 군대를 보내라고 호소할 요량이었다. "베트남을 저 어려운 한국이 구매했다. 당신들도 사야 한다." 또는 "살림이 넉넉지 않은 한국이 이만큼 헌금했다. 잘사는 여러분은 충분히 더 할 수 있다." 존슨은 한국이 전투 병력 2만을 보내면 여기에 자극, 아니면 감동을 한 다른 나라 군대를 합쳐 모두 7만, 8만의 외국 군대가 베트남에 상륙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박정희에게 압력을 넣었다.

박정희는 1965년 5월 워싱턴으로 오기 위해 존슨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야 했다. 미국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그에게 이 극진한 친절은 압박의 정중한 포장이었다. 극진함이 중압감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부터 미국은 참으로 발 빠르게 박정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입장을 정리하고 정책을 수립했다. 처음 한달 동안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혁명세력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은 민정 회복의 중요성을 앵무새처럼 외쳤다. 하지만 한 달 후 케네디 정부는 혁명 세력을 어떻게 미국의 국익을 위해 활용할 것인가 냉정하게 연구하고 결론지었다.

미국은 혁명 정부에 대해 우호적이지만 확고한 변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했다. 더는 미국의 원조에 의지한 방만한 국가 경영을 종식하려 했다. 따라서 무상지원을 개발 차관으로 돌리면서, 과중한 국방의 부담을 줄이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주한미군 축소와 더불어 한국군의 규모를 줄이고, 동시에 병사들을 국토 건설과 경제 개발에 활용하는 정책 비전을 내놓았다. 북한과 전쟁이 나면 싸움은 미국, 특히 미군의 전략자산에 맡기고, 한국군은 방어선을 확보하는 역할을 맡는 구상이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전략 비전을 거부했다. 그는 미국이 경제, 군사 원조를 늘려 남한의 방위력을 압도적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의 거듭되는 원조 요구를 피할 방어벽이 존슨에게 있었다. 바로 미 의회의사당이었다. 미국의 행정부는 1센트 하나도 입법부의 인준 없이는 사용할 수 없다. 해외 원조도 마찬가지다. 존슨은 박정희가 거듭 지속적인 경제, 군사 원조의 필요성을 언급할 때마다 원조 규모에 대한 의회의 입장이 과거와 달리 냉정해 졌다고 전제했다. 그런데도 한국에 대한 원조가 유지되는 이유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의 지원 덕분이라고 했다. 더 구체적으로 미국이 앞으로 한국에 제공할 1억5000만 달러의 정부 차관이 의회를 통과하는데 베트남 파병이 큰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더 많은 군대를 보내면 의회가 더 많은 원조를 승인할 것이라는 뉘앙스는 박정희의 운신 폭을 줄였다.

베트남에서 싸워 한국 건설

1965년 베트남 전쟁 개입을 결정한 박정희는 스스로를 돕기 위해 쓰디쓴 약을 기꺼이 들여 마셨다. 동시에 미국의 국익이란 거대 벽 앞에 좌절하는 그의 모습도 발견한다. 그는 군사, 경제적 능력 없이 북한과의 대립과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즐겨 사용한 "싸우며 건설한다"를 풀어 해석하면, 베트남에서 싸워 대한민국을 건설함으로 북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능동적 등식이 나온다.

동시에 박정희는 원조는 미국이 국익을 지키는 데 활용하는 수단임을 확인한다. 존슨은 한국 군대의 베트남 파병이란 목표를 설정해 놓고 박정희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바이스(vise)'로 조여왔다. 바이스의 고정면은 미 의회의 원조 예산 삭감 의지, 반대편 이동면은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이었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 달라면서 주한미군의 축소를 언급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따지면, 한국의 방위 능력이 위축되지 않도록 조처하겠다는 추상적 답이 돌아왔다. 박정희가 이토록 잘 짜인 미국의 정책안과 회담 시나리오 앞에서 할 수 있는 반론과 행동은 많지 않았다.

18일 박정희가 존슨과의 두 번째 회담에서 던진 한마디가 미국의 파병 요청 앞에 선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대로 전한다. 한국은 60만 대군을 갖고 있다. 잘 훈련되고 단련된 이들은 한반도나 인도차이나 모두에서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 있어 미국 군대의 일부(formed part of US forces)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들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다. "박정희의 이 언질에 자신은 고무되었다고(President Park's assurance was very heartening)"고 존슨은 화답했다. 이렇게 한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달려갔다. 어느 정도 떠밀려 달려가는 상황이었지만 발걸음은 힘찼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