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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난장] 큰 글자, 큰마음

어르신이 읽는 대활자본
느리지만 꾸준히 늘어나

독서는 치매·우울증 줄여
노년층 콘텐트 키워가야

수필가 유선진씨가 새로 낸 큰 글자 책 ‘그와 내가 있는 삽화’에 들어간 김영희 작가의 그림. 미술치료를 전공한 김씨의 따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사진 지성사]

수필가 유선진씨가 새로 낸 큰 글자 책 ‘그와 내가 있는 삽화’에 들어간 김영희 작가의 그림. 미술치료를 전공한 김씨의 따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사진 지성사]

코로나19 대재난으로 모든 학교가 문을 닫았다. 다음 주부터 학생들이 텅 빈 운동장에 돌아온다고 한다. 최근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한 초등학교 대문에 걸린 문구를 보았다. ‘힘찬 새 출발! 여러분 모두가 미래의 희망입니다.’ 때가 때인지라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사실 인생 자체가 학교다. 순간순간이 교실이다. 수필가 유선진(84)은 이렇게 말한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학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재 삶의 내용이 학력이지요. 이웃과 사회에 유익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명문의 최고 학부 출신이라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공자님 말씀 같지만 사연을 듣고 보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유씨가 환갑이 된 1996년, 모교 미동초등학교 100주년, 무려 졸업 47년 만에 재회한 어릴 적 남자 친구의 얘기다. 가난한 9남매 집에서 태어나 평생 집안을 책임지면서 나름 성공한, 힘겹게 살아왔으면서도 주변을 살뜰히 챙기는, 그런데 지금은 심장혈관이 기름덩어리로 막힌 남자 친구와의 ‘사랑을 넘어선 우정’이 5월의 햇살처럼 쏟아진다.

여자 친구들은 동창회장을 맡은 그 남자 친구의 학력을 궁금해한다. 그를 다시 만난 지 6년이 지난 유씨도 그 대목에선 아는 게 없다. 하지만 자신 있게 대답한다. “세상에서 제일 사람을 잘 가르친, 제일 좋은 학교!” 눈이 어두워 지하식당 계단을 내려가지 못하는 자신에게 지팡이처럼 내민 남자 친구의 두둑한 손바닥에 박혀 있는 굳은살이 그의 젊은 날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 수필은 ‘사람, 참 따듯하다’(2009)에 실렸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그와 내가 있는 삽화’라는 제목으로 새로 출간됐다. 그런데 책 구성이 특이하다. 글자가 엄청 커졌고, 여백이 시원하다. 중간중간 원색 삽화도 곁들였다. 시리즈 제목 ‘어르신 이야기책’처럼 눈이 불편한 노년층을 배려한 편집이다.

이 시리즈는 현재 총 45종이 간행됐다. 주로 옛일을 회상하는 내용이 많다. 황순원·박완서·권정생·양귀자 등 문인들의 글에 예술치료를 전공한 화가들의 그림을 붙였다. 노인들의 기억 인자를 활성화한다는 취지에서다. 책을 낸 지성사 이원중 대표는 “2년 전 파킨슨병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책을 기획했다”고 했다. “치매·우울증을 예방하거나 진행 속도를 늦추는 데 가장 필요한 게 책 읽기라는 연구 결과가 있지만 정작 그런 어르신들을 위한 도서가 너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현재 우리 출판계에선 노년층을 위한 콘텐트가 빈약하다.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건만 노인들의 소일거리는 대부분 TV 시청에 머무른다. 눈이 불편해 독서 자체가 힘겹기도 하지만 읽을거리가 부족한 현실도 부인할 수 없다. 아직 활성화 단계는 아니지만 그나마 최근에는 출판사들이 활자 폰트를 키운 큰 글씨 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커뮤니케이션북스다. 2013년부터 모든 신간을 일반 단행본과 대활자본으로 내고 있다. 지금까지 3600여 종에 이른다. 이 출판사 엄진섭 상무는 “평균 수명 연장에 따른 실버 계층의 소비력을 주목했다”며 “매출도 도서관 중심에서 개인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부산에 있는 산지니 출판사도 문학·교양서 위주로 104종의 큰 글자 책을 냈다. 1990년 창간한 월간 ‘좋은 생각’도 2009년부터 큰 글자 잡지를 함께 발간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도 매년 3억원을 들여 전국 공공도서관에 큰 글자 책을 보급하고 있다.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215종 11만여 권을 지원했다. 반면 공공도서관 1000여 곳의 수요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대형서점 매장에도 관련 도서 코너를 거의 볼 수 없다. 일선 출판사도 추가 제작비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는 뜻이다.

코로나19로 ‘집콕’ 생활이 새로운 표준이 됐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분들에게 훌륭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큰 글씨, 큰마음이다. 유선진 작가의 또 다른 책 ‘내 사랑 엄지’의 한 대목이다. 고집 센 며느리 덕분에 자신도 성숙했다고 한다. “장점과 단점은 별개가 아니다. 동전의 양면같이 장점이 곧 단점이고, 단점이 곧 장점이다. 시어머니들이 새로운 고부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그렇게 서로를 보듬는 5월이 무르익고 있다.


박정호 / 한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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