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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 여행 100년, 비행기 표 속 '미로 찾기' 여전

e티켓에 빼곡한 국제조약
읽어보기에도 큰 부담
쉬운 표기와 설명 필요

조약, 국가를 넘어 일상 속으로

세계 최초 상용 민간 항공사인 네덜란드 KLM사가 출범한 건 1919년 10월 7일. 라이트 형제가 키티호크 언덕을 난 지 16년 만이다. 1930년 3월 에어프랑스는 당시 식민지였던 베트남 사이공으로 대륙 간 장거리 노선을 처음 연다. 마르세유~바그다드~콜카타~방콕을 이어가며 18번 기착하는 여정이다.

그 후 꼭 100년. 항공 여행은 국제사회를 바꾸었다. 사람.화물을 신속히 옮겨 서로 섞는 비행기만큼 국제화를 물리적으로 가능케 한 것이 있을까. 2005년 1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유럽 통합의 동력을 비행기에서 찾았다. 특히 90년대 저가 항공사 등장이 결정적이었다. 2014년 2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항공 운송이 유럽 통합에 '핵심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한다. 국제사회 전체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수많은 여객기는 어떻게 다른 나라로 드나드는가. 조약 때문이다. 2차 대전 막바지인 1944년 미국 시카고에서 체결된 '국제민간항공협약'이다. 193개 유엔 회원국 중 191개국이 가입했다. 독보적 가입률이다. 귀에 익은 국제민간항공기구(ICAO)를 세운 게 이 협약이다. 곧바로 항공사들은 자기들끼리 '협회'(국제항공운송협회.IATA)를 만든다. 본격적인 민간 항공 시대를 열었다. 지금 IATA 등록 항공사 290개, 공항 9000개가 전 세계를 거미줄처럼 잇고 있다. 이에 터 잡아 각국은 항공협정, 항공자유화협정을 서로 맺는다. 비행기를 날리는 건 기름만이 아니라 이들 조약들이다.



학교에서 국제법을 가르친다 하면 흔히 한.일 분쟁, 미.중 갈등처럼 국가들끼리 벌어지는 엄청난 일들만 떠올린다. 그러나 때로는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소소하게는 편의점 담배 진열장 구조도, 매일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도 조약의 산물이다. 수많은 조약이 우리 일상에 녹아들어 있다.

이 중 특이한 게 있다. 개개인에게 숙제를 내는 조약이다. 이름도 생소한 바르샤바협약, 몬트리올협약. 늘 받는 비행기 표에 적혀 있다. 내용인즉슨 "당신은 두 협약에 따라 비행기를 타니 내용을 알고 계시라"는 취지다. 수많은 조약 중 가장 단도직입적으로 개인에게 다가선다. 허나 거의 아무도 읽지 않고, 묻지 않으며 설명하지 않는다.

이제 e티켓 시대. 편하다. 항공권이 e메일로 온다. 예전엔 쿠폰북 같은 비행기 표를 신줏단지 모시듯 갖고 다니며 한 장씩 경유 공항에서 뗐다. 그런데 무심코 출력하면 대여섯장이 줄줄 나온다. 필요한 건 여정이 찍힌 제일 앞 한 장인데, 낭패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부턴가 새 창이 뜨며 묻는다. 여정만 뽑을지, 다 뽑을지. 어떤 항공사는 e메일 본문에, 또 어떤 항공사는 인터넷 링크를 걸어 비슷한 정보를 잔뜩 보낸다. 방식은 달라도 반드시 읽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돌이켜 보면 과거에도 그랬다. 종이 항공권 뒷면이 빼곡하지 않았던가.

여정 다음 장부터는 온갖 암호 같은 내용이다. 숫자와 기호가 가득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오로지 하나, 지불 금액뿐이다. 푯값 외 다른 내용은 두 손 들 수밖에 없다. 전공자도 이해하기 힘든 바르샤바, 몬트리올협약을 공부하라니. 비행기를 타려면 이 정도는 감수하라는 듯이 들린다. 이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바르샤바, 헤이그, 몬트리올

1920년대 항공 여행의 등장은 금방 복잡한 문제를 던진다. 사건.사고 발생 시 처리 문제다. 독일 사람이 프랑스 비행기를 타고 가다 이탈리아에서 사고가 나는 식이다. 이런 국제적 상황을 다룰 새 규범이 필요하였다. 서둘러 1929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조약을 체결한다. 바로 지금 우리 비행기 표에 적힌 바르샤바협약이다.

그 핵심은 비행기 회사들을 돕는 것이다. 이들의 책임 한도를 정하였다. 복잡한 항공 관련 문제를 신속히 처리하고 막 등장한 항공사들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1인당 피해 배상은 8300달러로 정했다. 물가 차이를 고려해도 지금으로선 터무니없는 액수다. 짐은 무게로 따진다. ㎏당 20달러. 금덩어리든 돌덩어리든 같다. 승객이 짐을 20㎏ 남짓 실으니 얼추 400달러다. 다만 이들 한도는 항공사에 큰 잘못이 있을 땐 적용치 않는다. 그러니 사고가 나면 그런 잘못이 있었는지 여부는 결정적 변수다. 지금도 가장 큰 다툼이 생기는 문제다.

아니나 다를까, 한도 증액 요구가 이어졌다. 55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의정서를 채택해 한도를 두 배로 올린다. 증액 요구는 계속되었다. 1999년 이번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모였다. 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조약을 체결한다. 역시 우리 비행기 표에 나오는 몬트리올협약이다. 그 결과 인명피해는 11만3100SDR(특별인출권.약15만8000달러)로 조정되었다. 잃어버린 짐 배상도 ㎏당 19SDR(약 26.5달러)로 하고 한도를 1131SDR(약 1584달러)로 올렸다. 귀중품은 별도로 신고해야 한다. 신고해도 2500달러가 한도다. 고가품은 직접 안고 타서 스스로 보호에 만전을 기하라는 뜻이다.

전 세계 크고 작은 비행기 관련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이들 두 협약 관련 분쟁은 여러 국가 법원에서 꾸준하다. 특히 그 출발점인 '항공사 과실', '사고', '상해'가 있는지를 두고 다툼이 이어진다. 예컨대 다른 승객의 범행 대상이 된 경우는 '사고'가 아니다. 기기 고장에 따른 급강하로 인한 정신적 충격은 '상해'에 해당하지 않는다. 항공사 책임이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비행기 표 속 암호는 이런 복잡한 내용을 품고 있다.

지금 국제사회엔 두 협약이 공존한다. 둘 다 가입한 나라끼리는 신협약인 몬트리올을 적용한다. 둘 중 하나만 가입한 나라엔 그 협약만 적용한다. 우리는 두 협약 모두 가입하였다. 이러다 보니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세계 곳곳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승객들 사이에도 최초 출발지에 따라 적용되는 협약이 다르다. 그러니 비행기 표에 두 협약 모두 써 두고 "각자 알아서 공부하시라"고 넘겨 버린다.

수수께끼 내용, 더 쉬운 설명으로

e티켓 이메일을 여는 순간 이 엄청난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인 거로 간주한다. 집요하게 긴 고지문을 보내는 이유다. 이제 비행기 표 여정만 보지 말고 그 전부를 한번 슬쩍 훑기라도 하자. 수수께끼 같은 내용은, 미안하지만 항공사 직원에게 계속 물어볼 도리밖에 없다.

전 세계 항공사들에 효율성은 하나의 종교다. 연료 소모를 줄이는 신소재로 동체를 만들고, 회전율을 최대치로 올리며, 더 많은 승객을 싣고자 한 층을 더 얹기도 한다. 심지어 입식 좌석(vertical seat)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승객을 촘촘히 태우는 방식도 최근 논의된다. 안전 기준을 넘어선다면 단거리 노선엔 새 클래스가 추가될지도 모를 일이다. 효율성의 관심을 이쪽으로 조금만 돌려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도형과 그림도 좋다. 항공 여행 100년, 비행기는 하늘과 땅만큼 바뀌었지만 여긴 여전히 1920년대에 머물러 있다.

숙제 내주는 비행기 표는 단지 하나의 예. 국제화 시대, 개개인의 일상 활동 깊숙이 국제규범이 들어 왔다. 수많은 조약이 평범한 사람들을 쫓아다닌다. 이들에게도 제대로 적용하려면 쉬운 표기와 친절한 설명이 첫걸음이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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