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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칼럼] 우리 아빠도 배 나왔어요!

김선희 냇가에 심은 나무 한국학교 교사

유난히 추웠던 겨울방학을 끝내고 학생들이 돌아왔다. 몇 주간의 방학이라 당연히 산만해진 우리 아이들을 집중시키는 처방전이 몇 가지 있지만, 가장 간단한 것으로 한다.
“자, 선생님이 책 읽어 줄게.” 제목은 ‘포도밭에 들어갔다 나온 여우’이다.
너무 배가 고픈 여우 한 마리가 먹음직하게 주렁주렁 열린 포도밭을 서성이다 높은 담을 어떻게 뛰어넘을까 고민 중에 우연히 발견한 작은 구멍! 곧 달콤한 포도송이를 먹을 생각에 신이 난 여우는 그 구멍을 통해 고개를 들이밀고 포도밭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시도할 때마다 배 부분에서 걸려 실패다. 마침내 여우는 한 3일을 굶어 튀어나온 배를 쏙 들어가게 만든 뒤 그 구멍을 간신히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목표를 정하고 며칠 굶은 뒤의 성과는 대단했다. 알알이 영근 꿀보다 더 달은, 잘 맺힌 포도송이를 배가 터지게 쉬지 않고 따 먹었다.
“아, 이젠 도로 나가 봐야겠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은 탓으로 튀어나온 배 때문에 처음 들어올 때처럼 나갈 수가 없었다. 다시 3일을 굶은 여우는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림을 보며, 보랏빛 포도밭의 풍경을 보며, 그 안의 여우를 보며 우리 아이들은 반짝이는 눈빛에 웃음이 넘친다.
“선생님, 그 여우는 머리가 나쁜가 봐요. 나 같으면 포도를 따서 밖으로 갖고 나와서 먹었을 텐데…”
“와, 주인한테 안 잡혔나요? 그 여우는 허락 없이 남의 것을 먹었네요.”
“아, 나도 포도 먹고 싶다…”
“선생님, 우리 아빠도 배 많이 나왔어요. ㅎㅎㅎ”


우와, 그런 생각을 하다니… 정말 똑똑한데… 이야기를 잘 들었네…등등의 칭찬을 해준다, 아이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책을 읽으며 동화 속에서 포도밭 주인도 되어보고 여우도 되어 보곤 한다. 아이들의 도화지 같은 순수함에 날마다 날마다 배운다. 봄학기 첫 수업을 하는 날, 반 친구들한테 새해, 한 살씩 더 먹었으니 뭔가 바꾸고 싶은 게 있는지, 하고 싶은 일이 뭐가 있냐고 물었다. 다들 골똘히 생각해서 친구들과 함께 나눈다. 그중에 과반수가 같은 대답을 한다.
첫째, 엄마 아빠가 말씀하시면 제대로 잘 듣기,
둘째, 자고 나면 침대 이불 정리해 놓기
셋째, 동생 돌봐 주기
넷째, 애프터 스쿨에서 좀 더 잘 지내기
다섯째, 한국학교에 나와 떠들지 않기
대견하고 또 대견하다. 훌쩍 키가 커서, 통통하게 살이 쪄서, 번쩍이는 치아 교정기를 붙이고, 구불구불 머리 모양을 달리하고, 외형적으로 달라진 우리 아이들의 웃음이 반갑다. 지난 가을 학기에 이어 다시 한글을 배운다. 단어장도 만들어 새학기의 다짐도 해본다. 각오가 대단하다. 그동안 배운 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지 받아쓰기를 해본다. 그럴 줄 알았다. 소리나는 대로, 아니면 비슷하게 써 놓는 진단 평가지를 보니 흠, 열심히 가르쳤던 땀방울이 아쉽다. 그래도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친다.
아하! 솔솔 기억이 나나 보다. 한 시간이 지나니 배웠던 것들을 기억해낸다. 다행이다. 받침을 배운다. 받침이 있어 달라지는 한글의 묘미를 우리 아이들이 느끼기 시작한다. ‘가’에 ‘ㅇ’ 이 붙으면 ‘강’이 되는, ‘무’에 ‘ㄹ’이 붙어 ‘물’이 되고 두 글자가 붙으면 ‘강물’이 되는 이야기를 배운다. 아름다운 우리 한글이다. 방학 동안 할머니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는 간혹 선생님을 ‘할머니’라고 부른다. 그리고는 바로 고쳐서 다시 부른다. ‘선생님!’ 어떻게 불리든지 오늘이 좋다. 우리반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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