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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겹겹’이 쌓인 상처뿐인 소녀들의 ‘귀향’

이소영/언론인

재작년이었나. 미국 출국 준비가 한창이었다. 4박 5일짜리 여행을 떠나도 가이드북 한 권 훑기 마련인데 지구 반대편으로 아예 살러 떠나면서 너무 태평한 것이 아닌가 싶어 근처 서점에 들렀다. 여행 도서가 정리된 파트는 역사·문화 파트를 가로지르는 길에 있었다. 온 김에 구경이나 하자 싶어 기웃거린 곳에서 눈에 띄는 책 한 권이 있었다. 화려한 표지 대신 ‘겹겹(사진)’이라는 모호한 제목(‘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겹겹’)에 서늘한 표정의 할머니들 흑백사진이 프린트된 표지였다.

한국도 일본도 아닌 중국은 뭔가.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역사의 또 다른 이야기가 있구나 싶어 책장을 들추기 시작했다. 책은 구구한 사연 설명 대신 흑백사진을 엮은 포토 에세이 형식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고향 땅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중국 오지에서 살아가는 조선인 할머니. 그녀는 80여 년 전, 일본군에 위안부로 끌려와 모욕을 당한 어린 소녀였다. 조선말도 잊은 채 할머니가 의지할 것은 고향 가족들이 보낸 사진 한 장이 전부다. 이것은 한 할머니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로 몸과 마음을 짓밟힌 채, 나라가 해방된 후에도 타국 땅에 버려진 많은 할머니의 이야기다.

“어디메로 도망을 쳐, 잡히면 죽어요.”-김순옥, “꽃이 피어 오르는걸 끊어낸 거지.”-김의경, “혼은 조선에 가 있어요. 꿈을 꿔도 조선 꿈이지.”-현병숙, “나이가 원수라… 인자 여기가 고향이여.”-박서운 <안세홍의 포토 에세이 ‘겹겹’ 본문 중>



‘위안부’가 되어야 한 사람들은 어디 별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이자, 이모이자, 언니였다.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수한 이웃들이 위안부가 되었다.

그러나 분노하며 가슴 아파하던 것도 책을 읽을 당시 잠시뿐. 서점을 나서자마자 이내 내 자리로 돌아와 일상을 살아갔다. 그러다 얼마 전. 한국 드라마를 무료로 볼 수 있는 사이트를 기웃거리던 중 KBS 1TV 광복 70주년 특집극 ‘눈길’을 클릭해 봤다. 여느 미니시리즈처럼 숨 가쁘게 몰아볼 필요 없는 2부작짜리여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적막한 서재에서 혼자 ‘눈길’을 보면서 또 한 번 조용한 충격에 빠졌다. 어린 소녀는 위안부에서 엄청난 일을 겪고 있었고, 콘돔이 부족해 매일 밤 물에 빨아가며 일본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종군위안부가 발각되지 않도록 소녀들에게 간호복을 입혀 사진을 찍고 ‘간호근로대원’이라는 거짓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위안부에 관한 내용은 학교에서 꾸준히 배웠기 때문에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책 한 권, 드라마 한 편 봤을 뿐인데 학창시절 한국사 수업 시간에 배운 것 이상의 울림을 느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편의 영화가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조정래 감독의 영화 ‘귀향’이다. 한국 개봉에 앞서 워싱턴 등 미주 시사회를 먼저 열고 영화에 관한 관심을 본국에 전달한 것은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귀향’ 열풍이 단순히 지나가는 바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괜스레 ‘겹겹’을 읽고도 무심하게 서점을 나서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오늘은 포털 사이트를 뒤져 ‘겹겹’에 실린 안세홍 작가의 사진들을 들춰보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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