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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틀어달라

이후남·나원정 기자
이후남·나원정 기자

[LA중앙일보] 발행 2018/04/17 미주판 2면 기사입력 2018/04/16 22:04

배우 최은희 별세…향년 92세
남편 신상옥과 영화 중흥 이끌어
'사랑방 손님' 등 130여편 출연
홍콩서 납북, 8년 만에 탈출
미국생활 "가정꾸린 유일한 때"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끈 톱스타 최은희씨.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끈 톱스타 최은희씨.

은막의 큰 별이 졌다. 16일(한국시간) 92세로 별세한 배우 최은희씨는 1960년대를 전후로 한국 영화 황금기 스크린을 누빈 톱스타였다. 이와 동시에 한반도 분단 상황을 극적으로 체험하며 남과 북 모두에서 영화 활동을 한 드문 배우였다. 특히 78년 신상옥 감독과 차례로 홍콩에서 납치돼 북한에 머물다 8년 만에 탈출한 것을 비롯해 그의 삶은 웬만한 영화보다도 훨씬 더 영화 같았다.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 무대를 누비다 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줄잡아 130여 편의 영화에서 활약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특히 신상옥 감독과 함께한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등의 영화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찌감치 67년 '공주님의 짝사랑'을 연출, 여배우 출신 국내 첫 감독이기도 했다. 부일영화상·청룡영화상·대종상 등 여러 차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은 한국전쟁 시기 부산 피란 시절로 거슬러 간다. 연극 공연 도중 쓰러진 그를 신 감독이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한 차례 결혼생활에 실패했던 고인과 미혼이었던 신 감독은 54년 결혼, 함께 영화제작소 '신필름'을 운영하고 안양예술학교를 설립하는 등 한국 영화의 눈부신 한 시대를 이끌었다. 76년 이혼한 두 사람은 78년 차례로 납북, 북한에서 해후하며 자연스레 재결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혼 사유는 널리 알려진 대로 신 감독이 배우 오수미씨와의 사이에 자녀가 생기면서다.

두 사람의 납북은 당대의 미스터리 사건이었다. 시작은 '배우 최은희 실종 사건'이다. 78년 초 홍콩을 방문 중이던 고인이 종적 없이 실종됐다. 그해 가을 신상옥 감독까지 사라졌다. 이들이 북한에 있다는 사실은 84년에야 당시 안기부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치'라고 공식 확인됐다. 납치를 지시한 것은 영화광이었던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북한에 납치되고도 여러 해가 지나서야 신 감독과 만나 서로 북한에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의 이름으로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불가사리' 등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중 고인이 주연한 '소금'은 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86년 영화제 참석 등을 명분으로 유럽으로 향한 길에 오스트리아 빈의 미국 대사관을 통해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로도 각종 논란을 우려해 10년 넘게 미국에 주로 머물다 99년 한국에 영구 귀국했다. 생전에 고인은 신 감독에 대해 "남편이라기보다 존경하는 예술가로 생각하며 살았다. 부부의 정도 정이지만 영화동지로서의 정이 더 깊었다. 북에서 탈출해 미국 버니지니아에서 3년간 산 게 가정다운 가정을 꾸린 유일한 때"라고 했다.

신 감독을 2006년 먼저 떠나보낸 고인은 4년쯤 전부터 신장 질환 등으로 정기적인 투석을 받으며 투병생활을 해왔다. 척추협착증으로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도 3년 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선 꼿꼿하고 단아한 모습을 보여줬다. 고인이 가진 생전 마지막 공식 인터뷰였다. 이 자리에서 고인이 들려준 여배우의 삶은 지금처럼 화려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고인은 "화려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지금까지 변변한 패물 하나 없다. 촬영장마다 짐을 풀고 다시 싸는 '트렁크 인생'이었다. 신 감독과 함께하면서도 개런티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돈 한번 풍족하게 쓴 적도 없다"고 했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로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꼽은 것도 그래서다. 고인은 이 노래를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틀어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고도 했다.

영화감독인 아들 신정균씨는 "어머니는 영화배우이시자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감독의 아내로서, 남편 내조와 연기생활을 병행하시면서 평생 사신 분"이라며 "'아직도 연기할 수 있는데' 말씀하실 만큼 연기 욕심이 많으셨다"고 전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유족으로는 신정균씨 등 2남2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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