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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트럭커의 사는 이야기

열 번째 - 알 수 없는 한국 사람

한국 사람에게 한국 사람을 물어본다. 대개 비즈니스 하는 분들은 까다롭다고 한다. 한국 사람 상대로 하는 장사는 힘들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을 물어보면 매우 친절하고 부지런하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상술에 능하다는 유태인들도 한국 사람은 경계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운영하는 가게 옆에 한국인 가게가 들어오면 난 망했다고 불안해하다가 그 옆에 또 다른 한국인 가게가 들어오면 난 살았다고 하는 유머가 있을 정도로 한국인은 누가 잘 된다고 하면 꼭 그 옆에 같은 분류의 가게를 만들어 서로 경쟁하다 둘 다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 사람은 못 살고 힘든 과정을 거쳐 성공하면 과거가 창피하다고 숨기지만 미국 사람은 힘든 과정을 거쳐 성공을 하면 과거에 이렇게 고생했지만 지금은 성공했다고 과거를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어쩜 한국 사람은 남 잘 되는 거 절대 못 보는 민족일 수도 있기에 과거를 숨기는지도 모른다. 남이 잘 되면 저 거 예전에 나보다 못했는데 지금 잘 나간다고 꼴사납다 하는 소리 종종 들었다.

그래서인가 내가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큰 도시에 가면 꼭 한인 마트에 들러 그 지역의 신문과 교회 CD를 꼭 챙긴다. 그런데 지역 신문을 보면 지역 한인회들이 안 싸우는 곳이 없다. 무엇 때문인지 법적 대응은 필수이고 서로 파가 갈려 너 나 할 것 없이 한인회고 체육회고 싸움투성이다. 때론 내가 창피하다. 미국 사람들이 한글을 안다면 얼마나 우릴 업신여길까 하는 생각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는지도 모른다. 불신과 남 잘 되면 깎아내리는 거...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한국 사람은 잔정이 많아 남이 불행에 빠지거나 힘들어 하면 자진해서 도와주고 함께하는 사례가 많다. 그리고 단일민족이라는 긍지도 엄청 강한 나라이기도 하다. 몇 년 전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 학생이 자동소총으로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이 난리가 났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덩달아 난리가 났다. 대통령까지 나서 사과를 하고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한국에서 미안해 했다. 미국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왜 한국 대통령이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사과하지? 분명 사고를 일으킨 학생은 미국인인데...



이번에 일본에서 발생한 크루즈 사건도 그렇다. 십여 명 넘게 한국 사람이 배에 타고 있는데 왜 빨리 그들을 한국으로 안 데려오느냐 방송에서 여론몰이를 하여 대통령 전용기까지 띄웠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한국계이지 국적이 한국이 아닌 사람이 반이 넘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국민을 잘 보호하고 같은 민족이라는 하나의 상징을 갖고도 국적을 불문하고 보호권 안에 둔다. 그러나 이민을 와 보니 아니었다. 한 면만을 보고 내가 판단을 할 수 있다. LA에는 영어 못하고 미국 브로커를 상대로 직접 일을 할 수 없는 오너들을 모아 디스패치(DISPATCH) 해주고 수수료를 떼어가는 디스패쳐(DISPATCHER)들이 많다. 영어가 부족한 드라이버들에겐 참 고마운 일이다.

그 디스패쳐들은 오너 드라이버 십여 명 이상을 모아 미국 브로커에게 일을 받아 나누어주고 한다. 드라이버들이 일을 하면 일단 모든 돈은 디스패쳐 통장으로 입금되어 다시 드라이버에게 돈을 준다. 그런데 일을 해도 돈이 잘 안 들어온다. 옷가게 하시는 분들이 종종 이 장사는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는 말을 하는데 이 일이 그랬다.

일은 쉬지 않고 했으니 들어와야 할 돈은 많은데 돈이 안 들어오는 거였다. 디스패쳐에게 재촉하면 아직 돈이 안 들어왔다, 다른 기사가 돈이 급하다고 해 잠시 빌려주었다 하며 일부분만 주고 차일피일 미루기 다반사였다. 여우를 피하니 범을 만난다 했던가. 몇 군데 옮겨 봤지만 비슷했다. 자동차 페이먼트에 보험료, 생활비, 아파트 페이먼트 등 매달 들어가는 돈은 고정적으로 필요한데 늘 돈에 쪼들렸다.

처음엔 왜 그럴까 했는데 디스패쳐들이 일한 돈이 입금되면 자기 돈인냥 마구 쓰고 돌려막기 식으로 중간에서 장난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나니 한국 사람들은 왜 이럴까 하다가 결국엔 LA 사람들은 왜 이럴까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LA 와서 나만 그런 건지 진실한 도움을 못 받았다.

난 형제초청으로 이민을 왔다고 전에 말했다. 형제초청은 10여 년 이상 기다려야 이민 순서가 된다고 알고 있다. 나는 초청한 사람도 기억을 못하고 초청했다는 소식도 못 듣고 있다가 생각지도 않게 미국에 온 케이스라 몇 년을 기다려 이민을 왔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기에 정작 순서가 되니 큰아이가 20세가 되어 CUT OFF에 걸렸다. 미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비자 발급된 후 6개월 이내에 미국에 들어와야 한다는 규정을 듣고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건 큰아이는 제외였다.

6개월을 믿고 있다가 큰아이 비자를 보니 큰아이는 CUT OFF에 걸려 3개월 이내에 미국을 들어가야 하는 거였다. 지금 같으면 별생각 없이 바로 미국에 들어왔겠지만 그때만 해도 고지식한 나로서는 급작스레 이루어진 이민이라 도저히 6개월 이내 미국을 들어올 수가 없어 큰아이는 미국 이민을 포기하고 미국과 가까운 멕시코로 유학을 보냈다. 그러면 우리가 미국으로 들어가도 자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그렇게 큰아이와 떨어져 있어 행여 큰아이가 혼자서 힘들까 날짜에 맞춰 매달 학비와 하숙비를 보내는데 그 돈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일은 하는데 돈은 안 들어오고 돈 보내는 것도 여의지 않아 이민 초기는 내게 상당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둘째도 한국서 대학 1년을 다니다 왔지만 다시 여기서 대학 공부를 해야 했기에 등록금이 필요했다. 계산해보니 한 달에 고정적으로 필요한 돈이 모두 합쳐 8500달러 정도였다. 내가 잠시라도 쉬면 안 되었고 집사람은 투잡을 뛰어야 이 돈을 메꿔 나갈 형편이었다. 돈 많은 사람에게 그 돈은 별 거 아니겠지만 우리 가족에겐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젠 가족이 뭉쳐야 할 시기였다.

둘째는 College를 다니면서 세탁소와 병원 데스크 안내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고 집사람은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투잡을 뛰었고, 난 한 번 나가면 두 달이 넘도록 집에 안 들어오고 미 대륙을 달렸다. 초기에 이민 오신 선배님들의 길을 우리도 걷게 되었다. 힘들어도 떨어져 있는 큰애에게는 걱정될까 말없이 꼬박꼬박 돈을 보내주었고 막내는 아직 어려 어리광만 피웠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어느새 삼 년이 흘렀다.

그런데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단의 개혁이 필요했다. 그래서 큰아이를 한국으로 돌려보내 거기서 미국으로 유학 신청을 하여 불러오는 거였다. 그 일은 둘째가 College를 다니기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드디어 큰아이가 미국 땅을 밟는 날 온 가족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공항에서 영주권을 포기하고 왜 유학으로 오느냐고 혼났다고 한다. 난 미국에 오면 아이들은 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둘째가 미국에 와 보름 동안 방에 나오지 않고 울었다.

어찌 할 바 모르다 둘째를 달랠 겸 친구를 사귀어 보라고 교회를 보냈다. 원래 우리는 카톨릭 신자라 성당을 보냈어야 하는데 성당은 너무 청소년 프로그램이 미약하고 엄숙함에 묻혀 있어 둘째에겐 힘든 거 같아 교회로 보냈다. 이 또한 특단의 조치였다. 다행히 교회에 다니면서 재미를 느끼고 어느 날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다.

한인 이민사회는 좁아 한 집 건너 또래가 있으면 형 아우하며 알게 된다. 둘째 아이가 보니 남자친구가 형이라 부르는 청년이 괜찮아 보여 언니 오면 소개해 주겠노라 미리 마음에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다려 큰애가 미국에 오니 바로 소개해 첫째 사위가 되고 둘째를 잘 돌보아 준 교회 청년은 둘째 사위가 되었다. 사위들끼리 친한 사이라 지금도 식구들이 만나면 재미있다.

첫째가 남자친구를 소개받고 얼마 안 있어 둘은 결혼을 하였다. 이것도 내겐 큰 복이었다. 첫째 사위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마이크로소프트에 다니고 있어 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다 하여 난 부업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장거리 3년 차 되어 사위에게 나의 일 잡는 걸 맡기게 되었다. LA의 디스패쳐와 거래를 중단하기 위하여 밀린 돈을 달라고 하니 돈이 없다고 체크를 몇 장 끊어주며 한꺼번에 입금시키지 말고 보름에 한 장씩 입금시켜 달라고 당부하기에 그렇게 하리라 약속을 하고 체크를 들고 시애틀로 올라왔다.

날짜가 되어 은행에 가서 체크를 건네니 상대방 어카운트에 돈은 있는데 내 체크를 블락시켜 놓아 돈을 줄 수 없다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당연히 내 전화도 안 받고 끝내는 몇 천 달러 죽 써서 개준 격이다. 남의 돈 갖고 장난하며 BMW 타고 다닌다고 과연 멋진 인생 사는 것 같은지,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무어라 답을 하는지…


△필자 김종박 약력
중앙대 부속 중고 졸
육군 삼사관학교 18기
영주전문대 경찰행정 졸
동양대 사회복지과 졸
사회복지사
현) 코리아 시애틀 익스프레스 오너 및 오퍼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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