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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영 칼럼] 고통이 은혜로 바뀐 경험

오래전, 아내와 둘이 조촐한 음식점에서 결혼생활 40년을 자축했다. 한국에서 십 년, 미국에서 30년, 좋은 일들과 어려웠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함께 살아오면서 제일 어렵고 암담했던 때를 돌아보았다. 아내는 다음 사건을 그동안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1969년 이른 봄, 나는 새 직장으로 떠날 준비로 짐을 싸고 있었다. 7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직장도 사표를 내고, 새 양복도 한 벌 맞추고 새 바바리코트는 선물로 받았다. 전화 연락을 받았다. 나의 이름이 문교부 임용에서 탈락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새로 생기는 교육 대학에 조교수로 임용되기 위한 문교부 승인을 받는 과정에서 탈락하였다는 것이다.

사범학교가 교육 대학으로 바뀌고, 교육 대학 교수양성도 여러 목적 중에하나인 교육대학원이 서울대학교 사대 안에 생기고, 내가 대학원을 마칠 때, 새로 생기는 교대에서 교수들도 새로 선출하니, 나에게는 타이밍이 좋았다. 주임교수의 추천서를 새 학장에게 전하는 자리에서, 새 학교라 할 일이 많으니 같이 열심히 일해 보자고 하시던 학장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 학장 비서가 학장이 서울 모 여관에 유숙하니 오라고 해서 만났을 때 비서는 문교부에 보낼 교수 승인 신청서라는 서류를 보여주었다. 그 명단 제일 처음에 내 이름이 있었다. 문교부 승인은 형식이라고 했다. 나는 임지로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차였다.

문교부를 찾아가서 담당 부서의 직원에게 내가 탈락한 이유를 물었다. 문교부 직원은 학교에서 보낸 명단에 나의 이름이 없었다고 했다. 장거리 전화로 대학에 연락해 보아도 문교부의 승인이 없었다고 반복했다. 억울하고, 난감하고, 답답하고, 확실히 알아보지 않고 사표를 낸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주임 교수님은 다른 지방 교대 연수원 전임으로 연결해 주셨다. 지방 교대 연수원 전임을 하며 주말엔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집으로 오갔다.

교육학 분야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신 한 분에게 서울대학교와 사립 명문 두 대학교에서 교수초청 제의가 있었고, 그분은 한 사립대학교를 선택했다고 했다. 1969 당시에 한국에는 교육학 분야의 박사과정은 없었고,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교수 네 분은 모두 서울대학교에 계셨다.

아둔한 나에게도 분명하게 보였다. 그 당시 미국 가서 박사학위만 받아오면 교수 자리는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미국에서 학위하고 오셔서 첫 강의 하시는 박 교수님 말이 자꾸자꾸 내 머릿속에서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되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야심이 없어! 내가 미국에 내렸을 땐 주머니에 동전 몇 잎이 절렁거렸지. 고생은 했지만, 학위를 하고 돌아왔잖아!”

어느 날 신문에 내가 가려다 못 간 교대 학장에 관한 기사가 대서특필로 났다. 그분은 교대 신축과정에서 부정이 드러나고, 새로 선출한 교수들에게 받은 뇌물이 들통나서 일본으로 도망갔다는 기사였다. 아, 뇌물... 나는 그때야 알았다.

난리 후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낮에는 일하고 밤에 야간학교들을 다닌 나에게, 고생할 각오만 하면 여러분도 박사학위 할 수 있다고 하신 박 교수님의 말이 용기를 주었다. 1971년 나도 미국 유학을 왔다. 학위 공부하느라 고생했다. 교수로 미국 대학에 적응하느라 더 고생했다.

“그래, 그때 한때 실업자가 되어 나도 힘들었지만, 당신은 더 힘들었을 거야?”
음식점에서 우리 결혼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그때를 돌아보며 내가 말했다.
“남편이 교수로 영전했으니, 언제 사표 내고 남편 따라가냐고 친구들은 묻는데, 남편은 대학원 졸업하자 졸지에 교수는 고사하고 실업자가 되고.”
“지금 미국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한국 시골 교대에 가서 사는 것보다 더 좋지 않아?”
“물론 좋지. 우리 애들도 여기서 잘되고.”
“그때 시골 교대로 갔었더라면 미국에 이렇게 왔을까?”
“거기서 눌러살았겠지.”
“그렇다면 우리가 미국에 와서 한국에서 보다 더 잘살게 한 것은 그 학장님 덕이 아닐까?”

우리는 그 사실을 좀 더 생각해보았다. 그분이 은인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그분에 대한 나쁜 감정은 사라졌다.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보니 미웠던 사람이 은인으로 변하기도 하고, 고통이 은혜로 바뀌어 우린 더 행복한 마음으로 결혼기념일에 축배의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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