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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성지 순례

손자들은 나를 “하지”, 할머니를 “하이야” 하고 부른다. 애들이 이렇게 부르니 가족이 따라 부르게 되었다. 큰 손자가 태어나 입을 떼기 시작하자 할머니, 할아버지 하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었으나 할아버지 발음을 못해 “하지”, 할머니는 “하이야”라고 말했다. 영어로는 HAJI, HAYA로 쓰고 있다.

몇 년 전 남미 여행 중 호텔에서 TV를 틀었더니 축구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팀인지 몰랐는데 주전 선수 이름이 ‘HAJI’ 였다. 손자가 부르는 하지도 누군가의 이름이구나 하고 웃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인 금년 2월 두바이 아부다비를 여행했다. 이슬람 박물관에 들려 무슬림들이 메카를 순례하는 비디오를 관람했다. 놀랍게도 여기서 하지라는 말이 회교도들의 성지순례를 의미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이슬람 교인에 하지 라는 이름이 많고 남미 축구 선수 역시 아랍계였을 것이다. 이슬람교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회교성전은 그저 관광 목적으로만 구경한 이 ‘하지’가 메카 순례라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꽤 많은 성지를 돌아 보았다.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선교 루트를 찾은 것이 아니라 성지 자체가 유명한 관광코스 였다. 터키·그리스 여행 중 사도 바울의 흔적을 보았고, 레바논에서는 우연히 백향목 숲을 보게 되었다. 먼 아랍 땅, 우아하고 기품있는 백향목 숲 속에서 울려 퍼진 한국말 찬송가를 들었을 때는 가슴이 메였다. 베이루트에 레바논 전력회사와 협약을 맺어 발전소를 도와주는 한국전력 직원과 유학생을 포함해 수십명 한인이 있고 이들은 주일, 한인 목사의 인도로 예베를 드리고 있었다.

30여 년 전에는 미국 주이시 연합 초청으로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할 기회가 있었다. ‘통곡의 벽’에 머리를 박고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의 성지 탐방 중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은 곳은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산맥 북쪽 산기슭의 소도시 ‘루르드’에 있는 성지였다. 호텔에 체크인 했더니 놀랍게도 휠체어 손님이 많았다. 자세히 보니 온 골목이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둠이 깔리자 성당 앞 광장에서 미사를 드린 후 필그림 행렬이 시작되었다. 성모상이 앞장서고 촛불을 들고 혼자 몸을 가눌 수 없는 휠체어 교인들이 그 다음 줄, 성한 다리를 가진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이 성지에는 14세, 어린 나이에 성령을 받고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 성녀 베르나데트를 기리는 세 개의 성당이 있다. 종교를 냉정하게 대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무척 감상적인 나, 진실로 열 네 살 성녀의 기적을 믿었다. 불치의 병으로 언제 이 세상을 떠날 지 모르는 허약한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순례자들은 기원하고 있었다. 이 때의 떨림과 울림은 오래 동안 나를 엄습했다.



나는 종교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나는 과학이 잡신을 하나 둘 죽였고, 이제는 유일신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댄 브라운 소설을 믿는다. 미주 한인교회의 성장세가 꺾이기 시작하고 있으며, 코로나19가 가정예배를 확대시켜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요즘 내 주변에 아픈 사람이 많고, 간혹 떠나는 분들이 생겨 산책길에 고개를 숙일 때가 있다. 기도라기보다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 간절한 바람이다. 물가에서 하늘을 향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말로 중얼거리며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다. 성지가 따로 있나, 내가 눈물로 기도하는 그 곳이 중요하지 않을까.


최복림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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