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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우리를 숙연하게 하는 것들

모니카 류 / 종양 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

노동절을 보내고 나니 이젠 가을이다. 가을이 왔다는 생각에서인지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계절의 변화에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닌가 싶다.

특정한 계절에 따라 기분 변화의 기복이 심한 것을 의학용어로 ‘SAD(Seasonal Affective Disorder)’라고 부른다. 한국말로는 ‘계절성 정동장애’ 또는 ‘감정장애’라고 한다. 정신과에서는 뇌기능 장애의 일종으로 보지만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계절 변화에 대한 감성적 반응의 기복이 너무 커서 우울증이 오거나, 우울증으로 일상이 지장을 받아 약물을 복용해야 할 정도라면 장애로 간주해야 한다. 약간의 감정 기복은 병이 아니고 정상이다.

인류 문화에 공헌한 위대한 인물들은 어쩌면 바뀌는 계절이 가져다주는 자연의 변화를 통해 세상과 사람을 다시 보게 됐고, 그런 고민의 과정을 거쳐 대작을 탄생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좋은 글, 의미 있는 그림, 장엄한 음악 등이 만들어졌을 것 같다.

SAD 환자가 아니었을까 싶은, 50대 이상의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독일 작가를 생각한다. 그의 글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팬데믹 덕분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책 읽을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됐고 먼지 쌓인 책들 틈에서 ‘다시 읽는 국어책(2002년 지식공작소 발행)’ ‘고등학교’, ‘중학교’ 두 권이 눈에 띄었다. 1965년과 1979년에 발행된 국어 교과서의 내용에서 선정된 글들을 뽑아 만든 책이다. 참고로 여기에 담긴 글들은 한국 교육정책 개편 때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기미독립선언문’, 김동환의 ‘산 너머 남촌에는’, 방정환의 ‘어린이 예찬’,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윤동주의 ‘서시’, 이육사의 ‘광야’, 알퐁스 도데의 ‘별’, 릴케의 ‘가을날’ 그리고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등이 그 예이다.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는 여행을 한 셈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다시 읽어보면서 철학이 담긴 그의 서정적인 문장에 다시 감동했다. 안톤 슈냐크가 궁금해 검색해 보았다. 독일의 시인이었던 그는 놀랍게도 나치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한 작가 88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대인 학살을 눈감았던 그는 이 글을 1941년에 썼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의 양광이’, ‘동물원에 잡힌 범의 무서운 분노, 괴로운 부르짖음’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의 이 좋은 글은 그의 삶을 반영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그가 이 글을 가을에 썼다고 간주하고, 어쩌면 그는 SAD 환자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멀리 프리웨이에서 보이는 어둠을 비집고 일터를 향해 한 줄로 움직이고 있는 헤드라이트가, 허름한 차를 몰고 조간신문을 배달하는 뚱보 히스패닉 아저씨가, 배달 시간을 맞추려고 밤 10시에도 물건을 나르는 아마존 배송 청년이, 공동묘지 초입에서 꽃을 파는 히스패닉 아줌마가, 병원 입구 골목에서 모둠 과일을 팔고 있는 젊은 여인이 이 가을에 SAD와 무관하게 나를 숙연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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