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 Angeles

68.0°

2020.02.25(Tue)

[김대성 목사의 이민과 기독교]초기 중국계 이민자들과 종교

김대성
김대성 

[시카고 중앙일보] 기사입력 2020/01/23 18:01

1840년대와 50년대 서부의 “골드 러시”는 미국 내 여러 노동자들을 서부로 몰려들게 했을 뿐 아니라, 중국계 이민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52년에는 2만명 정도의 중국인 노동자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거주했습니다.

광산업의 열기가 가라 앉자, 중국인들은 미국횡단철로 건설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로키 산맥을 넘어가는 경로에서 작업하는 수많은 중국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1869년 철로 공사가 끝나자 다시 공장과 농장의 노동력 공급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상점, 식당, 세탁소 등의 사업에 종사하는 인원이 증가하여 1880년대에는 30만명을 헤아렸습니다.

중국 이민자들을 둘러싼 환경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중국인들은 게으르고, 지저분하고, 부정직하고, 지적으로 부족하다는 편견이 미국인들 사이에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1880년대 이후 긴 불경기 동안 대부분이 노동에 종사하는 이민자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럽계 이민자들이 노동시장에서 중국인들과 경쟁관계에 있고, 그들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은 차별과 거부감으로 나타났습니다. 정치인들은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이용해 자주 중국인들을 희생양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결국, 1882년 중국인 이민 금지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중국인은 미국으로 이민할 수 없게 되었고 이 법은 10년마다 갱신되어 2차 대전 때까지 이민 장벽이 되었습니다. 중국인들이 이민 금지, 편견과 차별, 그리고 경제적 취약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약 절반의 중국인들은 몇 년간 돈을 벌어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에 남은 이들은 함께 모여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우호적인 미국환경이 낳은 사회적 대응이었습니다. 좁은 지역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많은 인구가 모여 사니, 주거와 건강을 위한 환경은 열악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어와 문화를 표현하는 차이나타운은 심리적, 사회적으로 안정된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사업은 물론 상호부조를 위한 조직과 자생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남성이었기에 정부로부터 예외를 얻어 신부들을 초청하기도 하고 자녀 교육을 위한 학교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그리 종교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모이고 음악과 선교활동에 익숙한 미국인들에게 중국의 종교활동은 너무 조용하고 정적이었습니다. 불교, 도교, 유교 등 중국의 전통 종교는 공공의 장소에 드러나기 보다는 가정이 중심이었고, 중국인 모임에서는 종교활동은 흔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종교성을 잃어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조상을 기억하고 숭배하는 의식과 이를 위해 초와 향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음력 설을 지키며, 절기와 예식에 따른 음식, 그리고 출생, 결혼, 장례 등에 드러나는 축하와 기념예식에 풍부한 종교적 전통이 반영되었습니다. 집집마다 작은 제단과 향을 볼 수 있었고, 중국인들의 거주지에는 큰 신상도 세웠습니다.

중국인들의 고유 종교는 전혀 다른 환경을 가진 미국에서 발전했을까요? 아니면 소멸했을까요? 초기 중국이민자들의 종교는 약자의 종교였고, 차이나타운의 종교였고, 생활과 생존에 함께 했던 종교였습니다. 하지만 유럽계 이민자들처럼 자신들과 비슷한 교회나 종교전통을 찾을 수 없었던 중국인들은 점차 미국의 종교환경과 접촉하고 대화하면서 변화를 겪게 됩니다. 많은 이민자들의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 커뮤니티 교회 담임, McCormick 신학교 겸임교수]

오늘의 핫이슈

PlusNews

포토 뉴스

전문가 칼럼전문가 전체보기

한청수 한의사

한청수 한의사

HelloKTown

핫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