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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힐링의 공간과 인문적 성찰

세상살이가 즐거움과 기쁨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이야기는 동화에나 나온다. 벅찬 하루를 마치며 다음 날 또 뭘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다. 관계도 만만치 않다. 사람들이 무슨 생각과 욕구를 갖고 있는지를 잘 눈치채고 행동을 조율해야 한다.

삼나무·편백·졸참나무 등으로 우거진 제주의 사려니숲길은 내 마음 한 켠의 피난처다. 10㎞에 펼쳐진 길을 무심하게 걸으면 번잡한 나의 삶의 먼지들이 가라앉으며 자연에 동화하기 시작한다. 시각에 편중되어 있던 나의 감각은 피부에 닿는 바람을 느끼고, 새소리·물소리를 들으며 이리저리 확장되어 간다. 몸속 깊은 곳에 있는 늘어져 있던 세포가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힐링이라고 하던가?)

쉼은 쉼으로 끝나지 않는다. 숲길을 걸으며 나는 잊었던 나를 만난다. 잊힌 얼굴들이 떠오르고, 그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묻고, 과거에 꾸었던 꿈도 생각하며 나의 삶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 묻는다.

성찰로 이어지는 거리 두기를 어떤 이들은 고독이라고 부른다. 고독은 내가 선택한 것이어서 강요된 고립인 외로움과 다르다.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몸을 돌려 자신을 대면하는 것은 때론 힘겹기는 하지만, 새로운 길을 향하여 내 눈을 열어준다. 독일 시인 릴케는 고독은 모든 관계를 모아들여 열린 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안내자라고 이야기하며 시는 고독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키르케고르와 하이데거에게서 고독은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물질적 가치관에 휩쓸려 소실되어 가는 자아를 회복하는 통로다.



마음은 제도의 소산일진대 힐링과 성찰을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는 일이다. 숨 쉴 틈을 주는 근로 제도와 환경이 마련되고, 회복을 위한 문화 예술 공간이 확충되며, 이들을 아우르는 복지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 갈 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쉼과 여유를 위한 사회적 의식과 제도는 상당히 개선되어 다행이다.

성찰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AI 시대 낯선 세상이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직업 시장이 요동칠 것이며, AI와 생명과학 기술이 인간의 목표와 적절히 조율되지 않을 때 어떤 파국이 올지 모른다고 걱정한다.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지만, AI와 함께 풍요로운 미래를 만들려면 어서 머리를 맞대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같이 꾸어야 한다. 그런데 엄청난 양의 정보가 무료로 무제한 유통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차 자신의 기호에 맞는 정보만을 취하여 확증편향은 커지고 갈등이 증폭되어 간다. 공동의 성찰이 더욱 필요한 때, 우리는 아집과 갈등으로 향한다.

성찰을 위한 사회적 제도의 가운데 인문교육이 있다. 인문학은 쾌적한 힐링이 아니라, 때론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을 생명으로 한다. 인문학은 향기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되돌아보는 나의 모습, 인간의 모습에서 썩은 내가 날 수도 향기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쓰든 달든 미래에 대한 그림은 여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고전을 통하여 세상과 고독한 거리를 두며 ‘인간의 무늬’를 되돌아보는 인문 교육은 동서양에서 공히 귀중하게 여겨졌다. 시민성이 여기서 만들어지므로, 어떤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인문학은 의료·도로와 같은 공공의 자산으로 간주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인문교육이 신음하고 있다. 소년과 청년들은 무한경쟁에 내던져진 채, 고전 읽기는 자기소개서의 장식재료 넘어 멀리 가지 못한다. 많은 대학에서 인문학 전문 인력은 줄어들고, 정부는 취업률을 고려하여 대학을 지원한다. 인문학에 대한 제도적 소홀함은 성찰에 대한 냉소를 부추긴다.

지난 한 해 나라 안팎에서 편 가르기와 상호 비방이 넘쳐났다. 정의가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자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염되면서, 욕망과 아집으로 벼려진 칼날이 너덜너덜한 절제와 성찰의 칼집을 헤집고 주변에 상처를 내고 있다. 인문적 성찰이 깃든 사람들이 내 주위를 채우기 바라는지, 아니면 집단 이기주의에 물든 갈등 사회에 계속 살고 싶은지 생각해 봐야 할 때다.


김기현 / 서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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